#반도체 설계 업체 A사는 출퇴근 기록 카드를 없앴다. 옛날 방식인 데다 그룹웨어(일정관리·전자결제·메신저 등이 가능한 기업용 소프트웨어)로 임직원 출퇴근을 관리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룹웨어에는 특별한 기능이 숨겨져 있다. 근무시간이 일주일에 52시간을 넘지 않도록 설정된 것이다. 가령 한 직원이 오전 7시에 출근했어도 그룹웨어에는 오전 9시로 남는다. 실제 근무시간은 별도 관리된다. 초과 근무를 따로 기록해 월말이나 월초 등 특정 시점에 이를 보상한다. 단 보상이 끝난 후 자료는 폐기된다. “업무 시간을 줄여 인력 충원을 유도하는 주 52시간제 취지는 좋고, 동의합니다. 하지만 기술 집약적인, 특히 개별 역량의 차이가 회사 성과를 좌우할 수 있는 경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핵심 인력은 대체 불가능하기에 근무시간 제한은 프로젝트 지연을 낳고, 결국 사업 기회 자체를 소멸시킬 수 있는 큰 위험이 됩니다.” 인사를 총괄하는 A사 관계자가 조심스럽다면서도 기자에게 전한 호소다.
주 52시간제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중소기업, 대기업 모두 새 정부에 바라는 최상위 과제로 꼽힌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해 10월 중소기업 600곳을 대상으로 실시한 '20대 대통령에게 바라는 의견 조사'에서 가장 많은 49.3%가 주 52시간 개선 등 근로시간 유연화가 공약에 반영돼야 한다고 꼽았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1월 상위 500대 기업 인사·노무 실무자를 대상으로 새 정부가 가장 시급하게 개선할 과제를 묻는 설문에서 '근로시간 규제 완화'(23.8%)가 '중대재해 처벌법 보완'(28.6%) 뒤를 이은 2순위로 꼽혔다. 대·중소 기업이 한목소리로 주 52시간제 개선을 호소할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기업 현실과 맞지 않아서다.
업무량 증가 등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근로자가 주 52시간 넘게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특별연장근로' 제도가 있다. 고용노동부가 국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특별연장근로 신청 건수는 지난해 7185건으로 역대 최다치를 기록했다. 2019년(966건) 대비 7배 이상 폭발적으로 증가했으며, 지난해는 9개월 만에 2020년 1년 치(4542건)를 넘어섰다. 그만큼 불가피하게 주 52시간을 넘겨서 일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주 52시간은 상당수 기업에 몸에 맞지 않는 '불편한 옷'이란 얘기다. 정부도 이를 인정이라도 하듯 기업이 신청한 7185건 중 90%(6477건)를 승인했다.
문제는 주 52시간제가 기업 현실과 맞지 않아 절차·행정적 불편 야기에 그치지 않고 편법이나 불법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A사처럼 실제 근무와 서류상 근무시간이 다른 경우가 부지기수로 확인된다. 스타트업 B사 대표는 “업무를 하다 보면 밤늦게까지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식 근무시간으로 남는 건 하루 8시간이며, 오버타임이면 연차로 지급하거나 다른 형태로 보상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직원들도 보상을 받는다면 반발심은 없고, 직원들이 오히려 먼저 '오늘 좀 더 일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묻는다”고 말했다.
식음료 스타트업 C사도 특정 시간대로 근무시간을 정해 놓고 초과 시 별도의 성과급 형식으로 지급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와 서류상 시간이 다른 이중장부가 일상화한 모습이다. A사 관계자는 “조사 대비 차원으로 서류상 주 52시간을 맞추고는 있는데 범법자가 되는 기분이어서 마음이 아주 불편하다”고 말했다.
<키워드> 주 52시간제= 정부는 휴식이 있는 삶을 보장하기 위한 '일·생활 균형 및 1800시간대 노동시간 실현'을 국정과제로 삼았다. 노동시간을 주 최대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단축하고 특례업종을 축소하는 내용을 담은 '근로기준법' 개정을 추진했다. 개정안은 2018년 2월 28일 국회를 통과해 2018년 7월 1일 시행(단계적)됐다.
특별취재팀(윤건일, 권건호, 유근일, 조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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