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가 전략 무기로 탈바꿈했다. 발단은 중국이다. 세계 패권을 노리던 중국은 반도체라는 빈틈을 발견했다. 세상 어떤 제품과 산업도 반도체라는 기틀 없이는 부상하기 어렵다. 중국의 반도체 생산 자체 능력은 다른 선진국에 비해 뒤처졌다. IC인사이츠에 따르면 2019년 기준 중국 반도체 자급률은 15%가 조금 넘는 수준이다. 중국이 유치한 해외 기업을 제외한 순수 중국기업만 따지면 자급률은 한 자릿수에 불과하다.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어 반도체 생산 역량을 확대하려는 중국의 반도체 굴기는 이렇게 탄생했다.
중국은 절대적 위상을 노린다. 세계 경제 1위 미국은 좌불안석이다. 전광석화처럼 치고 오는 중국을 견제해야 하는데 미국 반도체 산업에도 구멍이 있기 때문이다. 뛰어난 지식재산권(IP)과 설계 능력, 반도체 장비가 있지만 생산 인프라가 부족했다. 세계화 추세에 따라 메모리는 한국, 시스템 반도체는 대만 TSMC를 적극 활용했던 전략에 따른 문제다. TSMC의 2020년 4분기 북미 매출 기여도는 70%가 넘는다. 국제 사회가 평화롭다면 큰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하나의 중국'이란 야심을 품고 호시탐탐 대만을 노리는 경쟁자가 언제 미국의 반도체 생산 거점을 흔들어 놓을지 모른다.
미국은 서둘러 반도체 생산 인프라를 자국에 둘 필요가 있다. 이를 뒷받침할 법적 수단이 반도체 생산촉진법이라 불리는 '칩스포아메리카'다. 2024년까지 미국 반도체 제조·장비 시설 투자비의 최대 40%를 세액 공제하는 강력한 지원책을 담았다. 지난해 상원에 이어 하원 통과가 임박했다. 이미 삼성전자와 TSMC, 인텔이 미국 파운드리 건설을 개시했다. 법이 제정되면 대미 투자가 한층 빨라질 전망이다. 유럽연합(EU)도 2030년까지 반도체 생산 점유율을 20%까지 끌어올리기 위한 '유럽 칩법'을 이달 발표한다. 기업 투자를 위한 인센티브가 골자일 것으로 보인다.
기존 반도체 시장은 민간 주도로 성장해 왔다. 특히 미국이 그랬다. 중국의 반도체 굴기 이후 추세가 바뀌었다. 반도체가 국가 안보를 좌우할 전략 산업이란 인식 아래 막대한 정부 투자가 뒤따른다. 이제 얼마나 반도체 생산 능력에 투자하느냐가 산업 경쟁력뿐만 아니라 국력을 결정 짓는 핵심 요소가 됐다. 바야흐로 반도체의 전략 무기화 시대다.
메모리 반도체 1위, 2030년까지 시스템 반도체 1위를 노리는 우리는 어떤 대비를 갖추고 있을까. 미국의 칩스포아메리카, EU의 유럽 칩법 격인 우리의 국가첨단전략산업 특별법은 반도체 시설 투자에 최대 16% 세액 공제하는 수준에 그친다. 대기업은 6%에 불과하다. 산업 형평성을 명분으로 인력 양성 지원도 용두사미에 그쳤다. 각종 규제 때문에 국내에 반도체 생산 시설을 짓기 어렵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국 반도체 생산 거점을 유치하려는 선진국과 대비된다. 지난해 5월 문재인 대통령은 삼성전자 평택사업장에서 열린 'K-반도체 전략보고' 행사에서 “반드시 글로벌 반도체 경쟁에서 승리하겠다”고 밝혔다. 경쟁을 넘어 전쟁이 된 시국에 승리를 위한 방법론이 의심스러울 뿐이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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