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중국 반도체 굴기 견제 공세는 막강하다. 첨단 공정에 발을 못 붙이기 위해 기술 수출을 가로막으며 '격차' 유지에 집중한다. 그러나 중국은 반도체를 국가 핵심 산업으로 키우려는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과거 반도체 육성 전략의 공과를 면밀히 분석하며 약점을 보완하고 있다. 당장 우리나라와 미국, 대만과 견줄 기술 확보는 어렵지만 반도체 산업 규모의 경제를 달성, 시장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여전하다.
◇中 2014년 국가적 반도체 투자, 여전히 유효
중국이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을 인식, 본격적인 기틀 마련을 시작한 건 2014년이다. 그해 6월 '국가 집적회로(IC) 산업 발전 촉진 강요' 정책을 발표, 반도체 제조 역량을 끌어올리기 위한 첫발을 내딛었다. 1387억위안(약 24조원)을 쏟아부어 반도체 1기 펀드를 조성, 본격적인 투자에 나섰다. 이런 중국 행보는 다음해 '중국 제조 2025'을 통해 장기 전략으로 수립됐다.
반도체 1기 펀드는 반도체 설계와 제조 능력을 키우는 데 집중됐다. 국가 지원금만 챙기고 사업화에 실패한 기업이 우후죽순 쏟아지면서 투자 실패라는 오명을 얻었다. 대표 사례가 우한홍신반도체제조(HSMC)다. 이 회사는 2017년 7나노 수준 파운드리 사업 전개를 위해 설립됐다. TSMC 핵심 인재를 영입하고 지방정부로부터 22조원이 넘는 돈을 투자받았다. 2020년 HSMC가 사업을 추진할 역량이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창업자가 잠적하면서 반도체 1기 펀드 실패 사례로 손꼽힌다. 반도체 1기 펀드 최대 수혜 기업인 칭화유니 역시 경영난에 휩싸이면서 반도체 1기 펀드 논란을 가중시켰다.
중국이 아무것도 얻지 못한 것도 아니다. 반도체 1기 펀드가 두 번째로 많이 투자한 중신국제집성전로제조(SMIC)는 지속 성장해 세계 5위 파운드리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2019년 말 14나노 공정 양산에 돌입한 회사다. SMIC 지난해 실적 발표에 따르면 매출은 54억달러로 전년 대비 38.4% 증가했다. 순이익은 17억달러로 139% 성장했다. SMIC는 2020년 12월 미국 수출 규제 대상에 오른 바 있다. 미국 제재 속에서도 올해 50억달러 투자라는 공격적 목표를 세웠다. 한 국내 반도체 장비업체 대표는 “중국 반도체 제조업 육성 전략이 실패했다고 하지만 실제 SMIC를 필두로 승승장구하는 기업이 곳곳에 존재한다”면서 “반도체 장비 수입도 이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밝혔다.
수율 문제 등 실체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지만 양쯔메모리(YMTC)도 2020년 128단 3차원(3D) 낸드플래시 양산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일부 국내 후공정 장비업체가 YMTC에 제품을 수출하며 성과를 내고 있다.
◇반도체 2기 펀드, 반도체 장비·재료에 집중 투자
중국 반도체 1기 펀드의 또 다른 성과는 반도체 설계 역량 확보다. 1기 펀드의 반도체 제조와 설계 투자 비중은 80%가 넘는다. 10나노 이하 한 자릿수 나노 공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주요 스마트폰과 PC에 탑재할 칩 설계 능력은 이미 확보했다는 것이 업계 중론이다.
반도체 제조와 설계 역량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지만 장비와 재료는 선진국과 격차가 크다. 글로벌 상위 반도체 장비사에 미국뿐 아니라 일본과 유럽 등 미 동맹국 기업이 포진했기 때문이다. 미국 수출 규제로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비롯한 첨단 공정 장비 도입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1기 펀드에서 장비와 재료 분야 투자 비중은 6%에 불과했다. 이에 중국이 눈을 돌린 건 14나노 이상 '성숙 공정'에 활용할 수 있는 반도체 장비다. 당장 가동할 수 있는 반도체 장비를 도입하겠다는 포석이다. 중국은 1기 펀드 투자 속도가 나지 않자 2019년 2000억위안(약 36조원) 규모 2기 펀드를 조성했다. 주요 투자 분야 역시 1기 펀드에서 미미했던 장비와 재료다. 중국 반도체 산업 경쟁력의 약점을 보완하겠다는 전략이다. 중국의 사상 최대 반도체 장비 수입도 2기 펀드 후방 지원이 컸던 것으로 풀이된다. 설계와 제조에 이어 반도체 장비라는 반도체 굴기의 마지막 퍼즐을 맞추는 중이다.
첨단이 아닌 성숙 공정 장비라도 중국은 충분히 실익이 있다. 2020년 기준 세계 반도체 소비 시장 규모는 4461억달러다. 이중 중국은 1434억달러로 33%에 달한다.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반도체 시장이다. 그만큼 내수 시장이 탄탄하다는 의미다. 당장 첨단 공정 반도체를 생산하지 못하더라도 충분한 수요가 있는 만큼 시장을 지속 확대할 수 있다. 중국 내 스마트폰과 데이터센터, 전기차 시장이 지속 성장하고 있어 반도체 수요도 견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글로벌 반도체 수급난도 중국 반도체 경쟁력을 키울 기회라는 평가다. 반도체 공급 부족 대표 품목은 전력반도체와 마이크로컨트롤러유닛(MCU), 디스플레이구동칩 등 대부분 8인치 웨이퍼 기반이나 12인치더라도 성숙 공정에 기반한 제품이다. 지금까지 중국이 수입·제조하는 반도체 장비로 충분히 소화할 수 있는 영역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성숙 공정 팹이 가동되면 글로벌 반도체 공급 부족을 어느 정도 해소할 것이란 기대가 있다”며 '반도체 쇼티지' 해결 주체로 지목하기도 했다.
◇이르면 올 연말 중국 반도체 시장 쏟아진다
중국은 시기적으로 반도체 시장 수요에 대응하기 유리한 위치에 있다. 반도체 공급난을 해소하고 생산 능력을 확대하기 위한 중국 외 글로벌 반도체 기업 투자는 이제 막 시작됐다. 부지를 선정하고 제조 공장(팹)을 세우고 장비를 도입해 가동하려면 2024~2025년에야 가능하다.
중국은 이미 상당수 클린룸을 확보해둔 상태다. 반도체 1기 펀드의 또 다른 성과다. 이미 공장 건물이 올라와 있어 신속히 장비를 설치할 수 있다. 업계에서는 지난해까지 중국이 수입한 반도체 장비가 본격 가동하는 시점을 이르면 올 연말 늦어도 내년 상반기로 본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