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부장칼럼]반도체 내셔널리즘 시대의 전략

[소부장칼럼]반도체 내셔널리즘 시대의 전략

가장 작은 것이 가장 큰 전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눈으로 보이지도 않는 것이 눈으로 봐도 믿을 수 없을 정도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역사상 하나의 물건이 이리 뜨겁도록 화제가 되고 내로라하는 국가들이 앞다퉈 자기 것으로 만드려고 한 적이 얼마나 있었는가. 반도체 이야기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수요 증가와 지능화 기기의 다양화, 자동차 진화 등이 복합 발현된 반도체 신규 수요는 공급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폭증하고 있다. 반도체가 없어서 제품을 생산하지 못하는 기업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정부에 대책을 요구했다. 미국은 전 세계 생산량의 12%에 불과했던 자국 내 반도체 생산량을 24%로 늘리려고 노력 중이다. EU는 10%에서 20%로 늘리고, 중국은 자국에서 소비되는 반도체의 국산화율을 15%에서 70%로 올리겠다고 천명했다. 잊힌 과거의 메모리 반도체 강국 일본도 부활을 외치고 있다. 이른바 반도체 내셔널리즘 시대의 도래다.

자국 내 반도체 생산을 유인하기 위해 각 나라는 아낌없이 돈을 풀고 인센티브를 준다. 미국은 527억달러, EU는 430억유로, 중국은 1조위안, 일본은 1조4000억엔을 쏟아붓는다. 반도체 설비와 연구개발 투자에 대해 대규모 세금 감면을 시행하고 법인세를 감면해 준다. 공장을 짓는데 필요한 부지와 전기, 용수를 정부 차원에서 제공한다.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서 음지에서 움직이던 보조금이 양지를 활보하고, 정부의 '개입 최소화 정책'은 '개입 최대화 정책'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생존의 문제인데 수단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살아남은 후에야 시시비비를 가리지 죽은 뒤에 사인을 밝힌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반도체 강국이다. 정확히는 메모리 반도체 강국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두 회사가 전 세계 메모리 반도체의 57%를 생산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스템반도체나 반도체 장비, 위탁받아 시스템반도체를 생산하는 파운드리 쪽으로 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쪽에서의 경쟁력은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다. 시스템반도체는 막막하고, 장비 쪽은 갈 길이 멀고, 파운드리도 힘에 부친다. 늘 경제 안보의 핵심 품목이라고 부르짖지만 메모리 반도체를 제외하고는 안보를 지킬 만한 깜냥이 안 된다. 기술은 미국, 시장은 중국이 각각 잡고 있다. 우린 무얼 가졌는가.

우리에게 있는 것은 신념과 열의다. 지금까지 기적처럼 길러 온 반도체 산업을 지금부터 또 기적처럼 기르겠다는 결의와 노력이다. 반도체 산업을 제대로 하려면 엄청난 돈을 들여야 한다. 삼성전자는 자칫 그룹의 기둥뿌리를 뽑을 뻔했다. 현대그룹은 하이닉스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눈물과 상처의 파문이 우리 반도체산업에 새겨져 있다. 2021년 세계 반도체 시장은 5837억달러였는데 그 가운데 1151억달러가 우리가 생산한 반도체였다. 자랑스럽다. 하지만 반도체 산업이 우리 경제 안보를 책임지려면 여기서 한 걸음을 더 크게 내디뎌야 한다. 우리 스스로 개발한 시스템반도체를 우리 설비로 만든 파운드리에서 만들어 세계 시장에 팔 수 있어야 한다. 반도체 개발부터 생산·판매에 이르기까지 우리 손으로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그래야 위기 상황에서도 스스로 지킬 수 있다.

다른 나라도 반도체가 경제의 주축이자 안보의 핵심 품목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국가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을 기르려 한다. 우리도 이 대열에 동참했다. 법도 만들고 전략도 세웠다. 하지만 부족하다. 목이 마르다. 치열하게 펼쳐지는 거대한 경쟁 사막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만큼의 보급이 아니다. 우선 갈증이나 식히는 정도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전략과 이를 실현할 통 큰 정책이다. 1970~1980년대 개발기에는 그런 전략이 있었다. 지금은 세련된 전략들이 난무하지만 난공불락의 벽을 뚫을 한 방이 부족하다. 새 정부에서는 속 시원한 한 방의 통 큰 전력을 만들어 주길 희망한다. 그래야 우리 반도체산업이 죽지 않고 산다. 나라가 큰다.

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상근부회장 changhan.lee@ksia.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