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정부가 최근 '반도체 초격차 확보를 위한 지원 방안' 일환으로 시스템 반도체 산업 육성을 다시 꺼내들었다. 파운드리와 팹리스 투자를 통해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를 지원하겠다는 취지다. 2030년 시스템 반도체 1위로 올라서겠다는 목표를 이어가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기존 방식으로는 시스템 반도체 강국 도약이 사실상 어렵다고 지적한다.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 구조는 메모리와 견줘 훨씬 첨예하게 얽혔기 때문이다. 파운드리와 팹리스 지원 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숨은 생태계 주역을 바라보지 못하면 한순간에 산업이 무너질 수 있다.
◇디자인하우스 1위 대만
삼성전자는 시스템 반도체를 만들지만 파운드리 사업을 영위하는 만큼 종합반도체기업(IDM)으로 분류된다. 순수 시스템 반도체만 하는 팹리스 국내 1위는 LX세미콘이다. 그 외에는 대부분 중소기업이다. LX세미콘조차 세계 상위 10개사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한다. 매출액 기준 1위는 퀄컴이다. 세계 상위 10개사에는 6곳이 미국이고 4곳이 대만 회사다.
세계 팹리스 시장에서 우리나라 점유율은 1% 수준이다.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DB하이텍, 키파운드리 등 반도체 위탁 생산 인프라를 확보한 것치곤 미미한 수치다. 반도체를 설계하는 팹리스와 파운드리만 있다고 칩이 뚝딱 나오지는 않는다. 파운드리 공정에 걸맞게 설계 최적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 디자인하우스다.
디자인하우스가 있어야 팹리스는 파운드리 공정에 빨리 올라탈 수 있다. 그만큼 안정적이고 신속한 제품 양산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글로벌 주요 파운드리가 저마다 파트너십을 맺고 디자인하우스를 육성하는 이유기도 하다. 파운드리 입장에서는 팹리스 요구에 부응할 창구이자 가교 역할을 디자인하우스에 기대한다. TSMC는 VCA라는, 삼성전자 파운드리는 DSP라는 디자인하우스 파트너를 확보하고 있다.
이 디자인하우스 또한 세계 1위는 대만 글로벌유니칩(GUC)이다. TSMC의 VCA 중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작년 매출은 151억대만달러(약 6400억원)으로, 국내 디자인하우스 1위인 에이디테크놀로지 매출 두배에 육박한다.
GUC가 세계 최대 디자인하우스로 도약한데는 TSMC 공이 가장 크다. TSMC는 GUC 지분 투자까지 하며 자사에 최적화한 디자인하우스로 육성했다. GUC 매출 70% 이상이 TSMC발이다. TSMC 의존도가 높다는 지적도 많지만 세계 최대 파운드리를 업고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의 디자인하우스 담당 주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OSAT 1위 대만
반도체 생태계 가장 끝 단을 차지하는 것이 조립과 테스트를 담당하는 후공정(OSAT) 업체다. 최근 전공정에서 반도체 미세화 진전 속도가 늦어지면서 후공정 업계가 급부상했다. 첨단 패키지 기술로 시스템 반도체 기술 난제를 풀어가려는 시도가 잇따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OSAT 생태계 역시 대만과 견줘 취약하다. 대만 OSAT 기업인 ASE가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다. 2위인 미국 앰코 대비 2배에 육박하는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ASE가 고객사에 보다 통합적인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전자기기제조서비스(EMS) 시장에 진출한 성과다.
ASE 같은 회사가 대만에서 탄생한 것은 대만 기업 간의 협력 생태계가 그만큼 막강하다는 방증이다. TSMC의 패키지 물량 상당수가 ASE 쪽으로 흘러가는 낙수효과 덕이 컸다. 대만 UMC 등 현지 패키지 수요에 대응할 수 있다는 강점이 있다. ASE의 작년 매출 중 북미 비중이 가장 컸다. 두번째가 대만인데 아시아 전체 시장을 합친 것보다 많은 매출을 기록했다.
우리나라도 SFA반도체, 하나마이크론, 네패스 등 OSAT 기업이 활약하지만 규모면에서는 대만 OSAT 업체에 견주기 힘들다. 기존 메모리 중심 반도체 산업 구조 영향이 크다. 노동집약적인 전통 메모리 패키지 중심으로 시장을 이끌어다보니 첨단 패키징 신시장 진입이 느린 편이다. 국내 OSAT 업체 관계자는 “최근 시스템 반도체가 신성장 동력으로 주목받으면서 시스템인패키지(SiP) 등에 투자하는 움직임이 빨라졌다”면서도 “그러나 아직 대만 등에 비해 첨단 패키지 경쟁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정부-기업 원팀에 기업-기업 상생 생태계도 갖춰야
대만의 반도체 생태계 중 취약한 부분이 소재·부품·장비(소부장)다. 대만전자설비협회에 따르면 대만 반도체 전공정과 후공정 장비 자급률은 각각 1%, 15% 수준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반도체 장비 전체 국산화율이 20%인 것에 비해 뒤처진다.
대만 정부는 대만을 '세계 반도체 첨단공정 센터'로 도약하고 2030년 반도체 생산액 5조대만달러(약 212조3500억원)를 목표로 소부장 지원에 나섰다. 이 정책 일환으로 반도체 개발 비용 지원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대만 반도체 장비 회사가 대만 반도체 제조사로부터 신뢰성 시험 진행 동의를 받으면 기술 개발비 일부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가령 대만 반도체장비사 징딩(Fiti, 폭스콘 산하)의 증착 장비를 TSMC가 테스트하기로 하면 정부에서 개발비를 투입하는 방식이다. 정부와 기업 간 협력 뿐 아니라 기업과 기업 간 상생 체계를 이끌어내려는 포석으로 풀이된다. 대만 반도체 생태계의 마지막 퍼즐인 소부장마저 우리나라를 위협할 수 있다는 의미다.
대만이 시스템 반도체 강국으로 도약한데는 TSMC를 필두로 한 강력한 후방 생태계가 갖춰졌기 때문이다. 각 분야에서 세계 1위 기업을 탄생시키려면 정부 육성 정책 뿐 아니라 기업 간 협업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우리나라가 시스템 반도체 강국이 되려면 대만을 압도할 상생 협력 생태계를 확보해야 한다”면서 “생태계 곳곳에 취약점을 보완하고 성장 잠재력이 높은 부분을 집중 육성해야 우리도 시스템 반도체 분야 세계 1위 기업을 키울 수 있다”고 강조했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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