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가 2019년을 대하는 느낌은 사뭇 다르다. 바로 일본의 수출 규제가 시작된 시기다. 당시 일본은 우리나라 반도체·디스플레이 산업에 꼭 필요한 3대 핵심 소재의 수출을 막았다. 반도체 제조에 쓰는 극자외선(EUV) 감광액과 불화수소, 폴더블 디스플레이에 들어가는 불화폴리이미드다. 반도체·디스플레이업계는 충격에 빠졌다. 3대 품목은 사실상 100% 일본 수입에 의존해 왔기 때문이다. 당장 첨단 반도체를 만들지 못할까, 폴더블폰을 팔지 못할까 하는 우려가 많았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안보 물자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탓을 수출 규제의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우리 국민은 거의 없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의 강제동원 문제로 일본과 날을 세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는 이를 두고 '정치가 산업에 개입했다'고 비판했다. 정치와 경제가 맞물려 간다지만 이처럼 국가 간 외교 다툼으로 비화된 정치가 반도체 산업을 뒤흔든 일이 발생한 때다.
결국 정치로 꼬인 실타래는 정치가 풀었다. 윤석열 대통령이 이달 일본을 찾아 한·일 관계 회복에 나선 것이다. 화답하듯 일본도 일단 수출 규제를 해제하겠다고 했다. 산업 관점에서는 일본발 공급망이 안정화되는 건 분명 도움이 된다. 여전히 반도체 공급망에서 일본의 역할은 중요하기 때문이다. 꼭 3대 품목이 아니더라도 반도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상당수를 일본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완벽한 회복은 없다. 정치 개입의 여파를 이미 학습했기 때문이다. 업계에선 언제든 정치 상황이 돌변할 수 있다는 우려가 뼛속 깊이 박혀 있다. 한 반도체 업계의 고위 관계자는 “기업은 현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믿을 정도로 어리석지 않다”면서 “안정적 공급망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 대응책을 수립했고, 이를 이어 나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특히 국제 정세가 변화무쌍하고 반도체가 국가 안보 전략 무기로 탈바꿈한 상황에서 이전처럼 대응해서는 급변하는 시장에 대응할 수 없다. 반도체 제조사들이 상생 협력이란 이름으로 협력사와 소부장 국산화 노력을 지속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정부도 관계 회복만 믿고 손을 놓아서는 안 된다. 기업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소부장 국산화 과제를 꾸준히 발굴하고 이의 연구개발(R&D)을 지원해야 한다.
첨단 전략 산업의 핵심 공급망을 꾸준히 추적하고 관리할 필요도 있다. 4년 만에 한·일 관계가 변화한 것처럼 언제든 상황은 바뀔 수 있다. 지속 가능한 중장기 전략 수립은 민·관이 함께 고민해야 할 일이다.
'교토삼굴'(狡兎三窟)이란 말이 있다. 꾀가 많은 토끼는 세 개의 굴을 파 둔다는 고사성어다. 여기서 굴은 은신처다. 토끼가 살 수 있는 방법을 여럿 마련해 둔다는 뜻이다. 한·일 관계 회복이 첫 번째 굴이라면 두 번째 굴은 기업의 공급망 다변화 노력이다. 세 번째 굴은 정부의 지속적인 소부장 국산화 지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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