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유리기판 시장이 열렸다. 차세대 기판으로 손꼽히며, 첨단 패키징 핵심으로 급부상한 유리기판 시장을 선점하려는 업계 쟁탈전이 시작됐다. 유리기판은 기존 플라스틱(유기) 소재 대비 인공지능(AI) 등 고성능 컴퓨팅용 반도체 기판으로 주목받는다. 생산능력과 기술 확보 여부에 따라 미래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주도권까지 쥘 것으로 예상돼 이목이 집중된다.
◇선두주자 앱솔릭스 올해 시제품 양산 가동...기판 공정 능력 앞세운 삼성전기는 맹추격
업계에 따르면, SKC 자회사 앱솔릭스는 최근 미국 조지아 1공장 건설을 마쳤다. 2분기 본격적인 공장 가동에 돌입할 것으로 보인다. 조지아 1공장은 2022년 11월 착공, 2억4000만달러(약 3200억원)를 투입했다. 연산 1만2000㎡ 규모 유리기판 생산 능력을 갖췄다.
앱솔릭스 조지아 1공장은 소규모 생산 시설(SVM)이다. 주로 고객사에 제공할 시제품을 양산한다. 이를 통해 유리기판의 성능과 수율을 확보한 후 대량 양산(HVM) 체제로 확장하는 것이 앱솔릭스 전략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일부 북미 빅테크 기업들이 유리기판에 관심을 가지고 앱솔릭스에 시제품 제조를 맡겼다”며 “고성능컴퓨팅(HPC)용 기판 고도화를 위한 포석”이라고 말했다. 앱솔릭스는 대량 양산을 위한 조지아 2공장 부지도 이미 확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앱솔릭스가 양산에 돌입하면 세계 최초로 반도체용 유리기판 제조가 이뤄진다. 유리기판은 기존 플라스틱 기판와 견줘 표면이 매끈하고 매우 얇게 만들 수 있다. 두께가 줄면서 신호 속도와 전력 효율성도 높일 수 있어 AI 반도체와 같은 첨단 반도체용으로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넘어야할 산도 많다. 세계 최초인만큼 양산 전례가 없다. 기존 공정 데이터가 없기 때문에 밑바닥부터 시작해야한다. 안정적 수율과 성능을 확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는 의미다. 고객과의 지속적인 신뢰성 검증 뒤에야 앱솔릭스의 대량 양산 전환이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
이를 노리고 맹추격하는 것이 삼성전기다. 삼성전기는 지난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24'에서 유리기판 시장 진입을 공식화했다. 이미 여러차례 프로토타입(초기형 시제품)을 개발한 뒤 사업화 가능성을 확인하고 시장에 본격 뛰어들었다.
삼성전기는 올해 세종 사업장에 유리기판 파일럿 라인을 구축한다. 시제품 생산 목표는 내년이다. 앱솔릭스보다는 1년 정도 늦지만, 제조 능력을 차별화 요소로 내세워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낼 방침이다. 유리기판은 소재 변화는 있지만 공정 상당 부분이 기판 제조와 동일하다. 플립칩-볼그리드어레이(FC-BGA) 기판을 예로 들어 총 15개 공정이 있다면 유리기판은 이중 4~5개 공정만 바꾸는 식이다. 기존 기판 제조 기술과 경험을 십분 발휘, 유리기판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전략이다. 삼성전기는 현재 다수의 잠재 고객과 만나 자사 유리기판 기술력을 알리고 있다. 또 다른 기판 강자인 LG이노텍도 유리기판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
◇'고객일까 경쟁자일까' 인텔 행보에 이목 집중...일본 기업도 참전
해외에서도 반도체용 유리기판을 둘러싼 각축전이 전개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이 대표적이다. 특히 미국 인텔은 지난해 5월 유리기판 사업 진출을 선언하면서 업계 지각 변동을 일으킬 주역으로 떠올랐다. 수요자인 동시에 공급자로서 유리기판 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인텔은 2030년 이전 첨단 패키징 전략 일환으로 유리 기판을 도입한다. 업계에서는 인텔이 유리기판 시장의 '큰손'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등 유리기판을 적용할 물량 자체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국내 유리기판 제조사 역시 인텔을 최대 고객사로 염두에 두고 있다.
인텔은 단순 유리기판 도입에 그치지 않고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고객에도 이를 제공하기로 했다. 최근 인텔이 집중 투자하는 파운드리와 연계한 전략이다. 파운드리 후발주자인 인텔이 TSMC나 삼성전자와 겨루려면 차별화된 서비스가 필요한데, 이를 첨단 패키징으로 낙점했다. 선제적으로 유리기판을 기술을 확보, 주요 파운드리 고객사에 유리 기판을 포함한 첨단 패키징을 '턴키' 형태로 제공하는 것이다.
인텔은 이를 위해 10년전부터 연구개발(R&D)을 추진해왔고, 이미 10억달러 이상 금액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인텔이 파운드리 사업과 함께 유리기판 시장을 공략할 경우, 앱솔릭스·삼성전기 등 국내 기업과의 경쟁도 불가피하다.
일본도 유리기판 전쟁이 참전했다. 일본 소재 기업 다이니폰프린팅(DNP)이 대표적이다. DNP 지난해 3월 유리 기판 시장에 진출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이미 차세대 반도체 패키징을 겨냥한 유리기판 기술을 확보했다. 특히 유리기판의 핵심이 되는 글래스관통전극(TGV) 등 기술력으로 보다 고성능의 패키징을 제공할 수 있다고 자신하고 있다. DNP는 유리기판 양산 시점을 2027년으로 잡고, 매출 50억엔(약 450억원)을 목표로 삼았다.
이비덴도 차세대 3차원(3D) 패키징 기술로 유리기판을 주목, R&D를 진행하고 있다. 구체적인 양산 계획은 아직 수립하지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이비덴은 글로벌 반도체 기판 1위로, 지금까지 축적한 기판 경험과 노하우를 앞세워 시장을 공략할 것으로 예상된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