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이 변해도 정말 크게 변했다. 우리와 일본 반도체 업계 얘기다. 일본 반도체 업체들은 십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기업들이 자신들을 절대로 따라올 수 없다고 큰소리쳐 왔다. 우리 반도체 산업 태동기에 한국 엔지니어들에게 기밀 정보가 가득한 생산 공정도 거리낌없이 보여줄 정도였다. 그만큼 깔봤다. 우리 업체들도 한동안 일본 공포에 시달렸다. 초창기 삼성전자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64KD램을 개발했으나 일본 업체들을 자극할 수 있다며 정부 관계자와 공개 여부를 놓고 고민했다. 지금은 우스갯소리로 들리겠지만 당시 관계자들은 `국운`을 걱정하며 회의장에 들어섰다고 한다.
이제 달라졌다. 파산 위기에 몰린 일본 유일의 D램 반도체 업체 엘피다의 매각 작업이 진행된다. 20여년 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을 휘어잡았던 일본 업체가 한국 기업들에 기술력과 자본력이 모두 밀려 몰락 직전까지 내몰렸다. 게다가 엘피다 인수전에 뛰어들었던 일본 전자업계 대표주자 도시바가 인수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SK하이닉스에 도움을 요청했다. 일본 업체가 엘피다를 인수할지는 이제 SK하이닉스의 손에 달린 셈이다. 깔보던 한국 기업에 고개를 숙이는 게 자존심은 상하겠지만 자국 D램 반도체 산업의 명맥이라도 유지하려면 불가피한 선택으로 보인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과거 일본 반도체 기업을 두려워한 삼성전자는 이제 경쟁 상대가 없다고 선언할 정도로 확고부동한 1위 자리에 올라섰다. SK와 한 배를 탄 하이닉스도 대만이나 일본 업체는 비교 대상이 못된다.
한때 승승장구했던 일본 반도체 기업들이 일순간에 무너진 것은 빠른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탓이 크다. 자신들이 최고라고 안주했던 자만심도 한몫했다. 1등에 오르는 것보다 그 자리를 지키는 게 더 어려운 법이다. 맨 앞자리로 올라선 우리 반도체 기업들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서동규 국제부 차장 dkseo@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