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 ‘소품종 대량생산’ 방식을 따르던 반도체에서 ‘다품종 소량생산’ 중요성이 계속 높아지고 있다.
D램과 낸드플래시 같은 메모리 반도체는 일정한 규격에 따라 동일한 제품을 얼마나 빨리 양산해 낼 수 있는지가 핵심이다. 미세공정을 갖추고 경쟁자보다 대량 생산으로 제품을 쏟아내는 것이 주요 경쟁력이었다.
하지만 시장 규모가 훨씬 큰 시스템 반도체는 다르다. 고객사가 원하는 성능의 제품을 최적화해서 맞춤형으로 제공할 수 있어야만 시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비슷한 칩일지라도 기능과 디자인을 차별화할 수 있어야 한다. 고객사가 원하는 대로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 경쟁력의 핵심이다.
우리나라는 소품종 대량생산체제를 따르는 메모리 반도체에서는 절대 강자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D램과 낸드플래시 중심 메모리 반도체에서 각각 35%, 19% 시장 점유율로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오랜 기간 이어진 ‘치킨게임’에서 살아남았고 해외 경쟁사보다 많은 투자로 공정 기술을 선도하면서 얻은 큰 성과다.
하지만 유연생산 방식이 필요한 시스템 반도체에서 우리나라는 여전히 변방에 머물고 있다. 전체 반도체 시장에서 75% 이상을 차지하는 비메모리 반도체에서 우리나라의 시장점유율은 5%대에 그치고 있다. 메모리 반도체 사업의 강점은 그대로 살리면서 다양한 시스템 반도체로 영역을 확장해 나간다면 ‘반도체 코리아’ 위상은 더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삼성전자는 D램과 낸드에서 쌓은 반도체 경쟁력을 시스템 반도체로까지 확대하고 싶은 욕구가 크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큰 성과가 나오지 않고 있다. 다만 최근 선보이고 있는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인 ‘엑시노스7420’이 시장에서 호평을 얻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히트작을 늘려나가면서 다양한 분야에서 시스템 반도체 경쟁력을 입증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시스템 반도체 외에 파운드리 물량을 크게 늘리기 위해서라도 유연한 생산 방식과 공정라인 확보는 필수다.
SK하이닉스는 최근 가장 가파른 성장을 보여주고 있는 회사다. 하지만 SK하이닉스 역시 D램 위주 사업 구조라는 한계가 있다. 시장상황 변화에 대비하고 고마진 사업을 추가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비메모리 분야로의 사업 확장이 필요하다는 관측이 적지 않다.
향후 반도체 신규 수요처로 꼽히는 사물인터넷(IoT)과 웨어러블 기기 시장이 크게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모든 사물에 통신 칩과 여러 센서가 탑재되는 시대가 예고된 것이다. D램과 같은 메모리 반도체 수요도 확대되겠지만 다양한 기기에 필요한 다품종 반도체와 센서의 중요성이 크게 높아질 전망이다.
IoT를 주도하려면 센서와 AP, 통신칩이 매우 중요하다. 모두 메모리 반도체와 달리 다품종 소량생산이 중요한 아이템이다. 우리나라는 IoT의 출발점이 되는 센서에서 기술력이 낮다. 가장 앞선 미국을 100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 센서 기술수준은 64에 그친다.
세계 센서시장에서 우리나라 점유율은 1.7%에 불과하다. 미국(31.8%)·일본(18.6%)·독일(12.2%)이 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우리나라는 중국(2.9%)에도 뒤처진 상태다. 내수 시장에서도 4분의 1(24.0%) 정도에만 국산 센서가 쓰이고 있다.
여러 제조사가 내놓는 웨어러블 기기에 탑재되려면 맞춤형 다품종 부품 공급 능력을 갖춰야 한다. 디자인 차별화를 꾀하는 여러 제조사에 동일한 규격, 같은 모양의 부품만을 공급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맞춤형 대응을 위한 유연 생산체제가 가동돼야 하는 이유다.
시장조사업체 가트너에 따르면 반도체 수요는 자동차와 일반 가전, 군용·항공우주 등 신규 분야에서 고성장이 예상된다. 자동차 반도체와 가전용 반도체는 올해 각각 7% 성장한 311억달러, 421억달러 시장이 예상됐다. 군·항공우주 분야도 8% 늘어난 38억달러 시장으로 전망됐다. 기존 주 수요처인 컴퓨터·통신 분야 외에 다양한 분야에서 수요가 확대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이들 역시 대량으로 생산해 낸 부품을 탑재하는 방식보다는 용도에 따라 개발한 맞춤형 반도체가 중요한 분야로 꼽힌다.
김승규기자 seu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