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바 반드시 인수하라”→“혼자 안 되면 연합하라”→“중화권으로 통째 넘어가면 큰일이다”.
최태원 SK 회장은 올해 초 일본 도시바 낸드플래시 메모리반도체 사업이 매물로 나왔을 때 '반드시 인수해야 한다'는 의지를 다졌다.
SK하이닉스는 D램에선 세계 기술 경쟁력을 갖췄다. 그러나 낸드플래시는 시장 참여 업체 가운데 최하위다. 원천 기술을 보유한 일본 도시바의 사업 자산을 인수하면 플래시메모리 부문 1위인 삼성전자를 위협할 수 있는 기술과 시장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판단했다. 추후 경영권까지 확보하면 경쟁사 하나를 제거할 수 있다는 기대도 반영됐다.
도시바는 메모리반도체 사업을 분사시키고 해당 법인 지분 19.9% 매각해 약 2조5000억원의 재원을 조달하려 했다. 그러나 이내 상황은 변했다. 도시바의 원전 사업 손실 규모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큰 것으로 나타나면서 지분 50% 이상의 매수자를 찾았다. 이후 “지분 100%, 회사를 통째 넘길 수도 있다”는 발표도 나왔다. 100% 지분을 인수하려면 2조엔(약 20조원)이 넘는 천문학 규모의 금액이 필요했다. SK가 재무 부문 투자사인 베인캐피털을 끌어들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최태원 회장도 일본으로 직접 날아가 SK그룹의 반도체 사업 비전과 시너지 효과를 피력하는 등 인수 건을 챙겼다.
대만 훙하이 그룹이 막대한 인수가를 적어낼 것이란 소문이 돈 것도 이때쯤이다. 훙하이는 애플 아이폰을 조립, 생산하는 업체로 성장했다. 아이폰 외 PC 등 다양한 완성품을 위탁 생산한다. 훙하이가 도시바를 인수하면 기존 고객사와의 관계를 기반으로 신규 공급 계약을 다수 따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왔다. 이렇게 되면 낸드플래시 시장의 경쟁 구도가 흔들린다.
더 큰 문제는 중국으로 기술이 이전될 가능성이었다. 삼성전자도 이런 결과가 나오면 회사에 적잖은 타격이 올 수도 있다는 식의 내부 보고서를 작성, 공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예상대로 훙하이는 지분 100% 인수에 3조엔 가까운 파격의 금액을 입찰 제안서에 써 냈다.
SK는 또다시 인수 전략을 바꿨다. 베인컴퍼니와 51% 지분 인수를 조건으로 입찰에 참여했다. 그러나 일본 정부의 후원을 받고 있는 관·민 펀드인 일본산업혁신기구(INCJ), 일본 정책투자은행에 참여를 호소했다. 매각을 반대하는 웨스턴디지털의 참여 가능성도 열어 뒀다.
훙하이가 입찰에 참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에선 '도시바를 해외에 팔면 안 된다'는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민간 기업의 회생 절차에 공공 자금을 투입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여론은 수그러들었다. 결국 명분이 생긴 일본 경제산업성이 나서면서 SK하이닉스, 베인캐피털, INCJ 등이 참여하는 한·미·일 연합 컨소시엄이 결성됐다. 훙하이는 배제됐고, 미국 브로드컴 컨소시엄도 우선 협상 대상자 자격을 받지 못했다.
도시바는 21일 “국외 기술 유출 우려, 고용 유지 약속 등 종합 평가한 결과 해당 컨소시엄의 제안이 가장 우위였다는 평가를 내렸다”고 밝혔다.
최대 주주의 지위와 경영권은 일본 쪽이 가져갈 것으로 보인다. SK하이닉스는 당초 생각한 만큼의 지분율 확보가 어렵고 직접 출자가 아닌 '대출' 형태로 컨소시엄에 참여하지만 중화권 국가에 도시바 메모리가 통째로 넘어가는 것을 막아 소기 성과를 달성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양사 간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면 메모리 반도체 시장에서 새로운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밝은 전망을 내놓았다.
국내에 진출해 있는 일본계 대형 반도체 장비 업체의 고위 관계자는 “도시바도 일본 정부의 공공 자금이 들어오는 그림을 가장 바라고 있은 것으로 안다”면서 “SK가 도시바는 물론 일본 정부의 가려운 구석을 잘 긁은 인수 전략을 펼친 것”이라고 평가했다.
한주엽 반도체 전문기자 powerusr@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