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곳만 찔렀다. 치밀하게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가 규제한 포토레지스트의 구체적인 품목을 본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평가다. 한국 반도체 제조 전반에 영향을 미치면서 연구개발까지 옥죌 수 있는 조치라는 것이다. 특히 한국서 이미 국산화가 돼 있거나 대체가 가능한 포토레지스트는 일본이 규제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국내 반도체 사업에 타격을 줄 품목만 취사선택하는 치밀함이 깔렸다는 분석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이 수출 심사를 강화하겠다고 대상에 올린 포토레지스트 종류는 총 4가지다. △15나노(㎚)~193나노 파장의 빛에서 사용하는 포지티브형 레지스트 △1나노미터~15나노 빛에서 사용하는 레지스트 △전자 빔 또는 이온 빔용 레지스트 △임프린트리소그래피 장치에 사용하는 레지스트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주요 공정인 노광 작업에서 핵심 소재 역할을 한다. 노광 공정은 빛을 이용해서 회로 밑그림을 웨이퍼 위에 찍어내는 걸 뜻한다. 웨이퍼 위에 포토레지스트를 바르고 빛을 쏘이면 웨이퍼에 회로가 그려진다. 포토레지스트는 반도체 제조에 꼭 필요한 소재다.
노광은 빛의 파장에 따라 공정이 다르다. 파장이 짧을수록 더 정교한 반도체를 만드는데 쓰인다. 파장에 따라 각각 다른 포토레지스트도 필요하다.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가 규제 대상에 올린 '15~193나노 레지스트'는 불화아르곤(ArF) 광원을 사용하는 반도체 레지스트를 칭하는 것으로 분석했다. 또 '1나노~15나노 레지스트'는 극자외선(EUV)용으로 풀이했다.
안진호 한양대학교 교수는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에서 하이엔드 반도체를 만들기 위해 쓰는 불화아르곤(ArF) 광원 파장은 193㎚, 극자외선(EUV) 광원 파장은 13.5㎚”라며 “파장 범위를 설정함으로써 공정에 실질적으로 쓰이는 포토레지스트 수출은 모두 막았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현재 사용 중인 반도체 소재를 겨냥했다는 것이다. 특히 EUV는 삼성전자가 공들이는 시스템 반도체 사업(파운드리 포함)의 핵심이다.
삼성전자는 EUV 기술을 앞세워 엔비디아, 퀄컴 등 글로벌 IT 기업 주문을 수주하고 있다. 이제 막 도약 단계에 접어들었는데, 일본은 EUV용 포토레지스트를 규제 대상에서 놓치지 않았다.
일본의 면밀한 계산은 우리나라가 국산화를 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품목은 아예 수출 규제 대상에서 뺐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노광 공정에는 248㎚ 파장의 불화크립톤(KrF) 광원도 활용된다. ArF 광원 전 세대로, 일본 정부는 KrF 포토레지스트는 제외시켰다. KrF 포토레지스트는 이미 국산화가 돼 있어 규제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이란 해석이다.
안진호 한양대학교 교수는 “KrF은 동진쎄미켐 등 국내 기업들이 지금도 바로 삼성전자에게 공급을 할 수 있다”며 “국내 소자 제조 공정에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제품만을 정교하고 세밀하게 골라내서 규제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번 분석에서 발견된 또 다른 문제는 일본 정부가 현업에서 쓰이는 포토레지스트 외에도 차세대 제품을 개발할 연구개발(R&D)용 포토레지스트까지 수출을 규제하고 나섰다는 것이다.
전자빔·이온빔은 현재 마스크 제작에 활용되는 광선이다. 아직 노광 공정으로는 상용화되지 않았지만 향후 EUV보다 짧은 파장으로 초미세 회로를 구현할 차세대 광원으로 주목받고 있다.
'임프린트리소그래피'는 마치 팔만대장경 목판처럼, 미리 새긴 나노 패턴 판을 웨이퍼에 찍어내는 방식의 노광 공정이다. 이 역시 미래 노광 공정 기술로 분류된다.
권기청 광운대학교 교수는 “일본 소재 업체들도 우리 기업들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차세대 기술을 연구개발하고 있었을 텐데 일본 정부의 규제는 현재 국내 소자업체나 장비업체, 학계와 연구기관에서 고안하고 있는 모든 포토레지스트를 차단한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소자업체에서는 포토레지스트 대체재가 없어 상당히 시급한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현재 재고로는 길어야 한 달 정도 버틸 수 있고 이르게 물량을 들여온다고 해도 유효 기간이 있어서 쓸 수 있는 양이 한정적”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위기 대응으로 여파를 최소화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한 업계 전문가는 “일부 소재가 국산화돼있다고 하지만 일본이 규제한 레지스트를 완벽하게 대체하려면 최소 5년이 걸린다”며 “이번 사안이 외교적 문제로 발생한 문제인 만큼 업체들보다는 정부가 나서 조속하게 해결해야 한다”고 전했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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