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가 D램에 극자외선(EUV) 공정을 적용할 채비를 본격화하면서 관련 소재부품 업계에도 상당한 지형 변화가 예상된다. EUV는 그동안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나 모뎀과 같은 시스템 반도체 제품에 한정돼 적용돼 왔다. 그러나 세계 최대 메모리 생산 업체인 삼성전자가 자사 핵심인 D램에 EUV를 본격 도입함으로써 관련 소재부품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할 전망이다. 삼성전자가 한해 생산하는 메모리(D램+낸드)는 2019년 기준 9881억개(1Gb 환산 기준)다. 연간 15억개로 추산되는 스마트폰 AP의 600배를 넘는다.
삼성전자가 EUV 공정에 어떤 소재나 부품을 적용하느냐에 따라 시장 판세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관련 업계는 이미 물밑 작업이 분주하다. 대표적인 예가 EUV용 포토레지스트(PR)다.
PR은 빛에 화학 반응하는 고분자 화합물이다. 웨이퍼 위에 액체 상태의 PR을 바르고 회로 모양을 머금은 빛을 쬐면, PR이 화학 반응을 일으켜 패턴 모양만 남게 된다. 회로 모양을 본격적으로 깎아내는 식각 공정을 하기 전 PR이 만들어낸 패턴이 없다면, 아예 회로 모양을 새길 수 없는 만큼 PR은 반도체 공정에서 필수적이다.
EUV는 기존 불화아르곤(ArF)과는 완전히 다른 광원이다. 광원이 달라진 만큼 EUV에 맞는, 새로운 성질의 PR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 EUV용 PR은 일본 기업이 주도하고 있다. JSR코퍼레이션, 신에츠화학, 도쿄오카공업(TOK), 스미토모화학 등이다. 지난해 7월 일본 정부가 우리 대법원의 강제 징용 판결에 대한 보복으로 EUV PR을 수출 규제 대상에 포함시킨 배경에는 일본이 세계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는 점이 깔려 있었다.
삼성전자는 현재 D램에 적용할 EUV PR 업체 선정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삼성은 JSR, 신에츠, TOK, 스미토모 등 일본 소재 업체와 미국 듀폰을 후보에 포함시켰다. 듀폰은 EUV PR를 신규 사업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주목되는 건 삼성전자가 EUV PR 업체를 선정하는 데 있어 공급망 안정화를 위해 '한국 내 생산'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로 공급망 관리 강화 필요성을 느낀 삼성전자는 EUV PR을 국내 생산 및 공급하는 방안을 각 제조사에 강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이 사안에 정통한 업계 관계자는 “JSR이 정부 규제로 수출길이 막히자 벨기에를 통해 삼성전자에 EUV PR을 공급한 사례가 있었는데, 삼성전자는 우회 경로와 같은 방식으로 제품을 들여오는 것이 아닌 국내 생산을 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의 이 같은 방침에 관련 업체들은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삼성전자가 세계 메모리 시장을 선도하는 대형 제조사인 만큼 놓칠 수 없는 고객이지만 한국 내 제조 및 공급을 위해서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 적지 않아서다. 특히 한국 내에 제조 기반이 없는 기업의 경우 공장 건설부터 기술 이전까지 더 복잡하다.
때문에 EUV PR 업계에선 신규 설비 투자로 한국 내에서 EUV PR을 생산하는 방안과 한국 내 공장을 두고 있는 업체에 생산을 의뢰, 즉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삼성에 공급하는 방안 등 다양한 시나리오가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현재 일본 업체 중심의 EUV PR은 재편될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특히 듀폰 행보에 업계 관심이 쏠리고 있다. 듀폰은 올 초 2800만달러를 투자해 충남 천안에 EUV PR 공장을 세우겠다고 밝혔다. EUV PR 다변화를 추진하는 삼성전자와 EUV PR 시장에 진입하려는 이해관계가 일치된 것으로 풀이된다. 삼성전자 EUV PR 공급망에서 듀폰이 상당 비중을 차지할 것이란 관측과 함께 JSR과 TOK도 공급 가능성이 큰 곳으로 거론되고 있다. JSR은 충북 오창에, TOK는 송도에 공장이 있어 일본 본사에서의 기술 이전 등으로 삼성전자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반도체 소재 업계 고위 관계자는 “JSR은 포토레지스트 업계 1위고, TOK는 삼성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것으로 안다”며 “신규 진입한 듀폰과 JSR, TOK가 삼성전자 D램용 EUV PR을 공급할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이라고 예측했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
윤건일 기자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