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수출 규제로 촉발된 국내 반도체업계의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경쟁력 강화 노력이 새해에도 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수입 다변화를 넘어 해외 생산 설비를 국내에 이전하는 곳이 나타났으며, 국내 반도체 업체들과 함께 첨단 기술을 연구개발(R&D)하기 위해 한국 진출을 결정하는 세계적 소부장 기업이 늘고 있다. 수출 규제를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은 한국 반도체의 위상이 '글로벌 반도체 허브'로 더 강화되는 모습이다.
3일 업계에 따르면 반도체 장비 업체 제우스가 일본 자회사 JET의 생산 라인을 한국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JET는 여러 개의 웨이퍼를 한꺼번에 넣어 공정 과정에서 생긴 찌꺼기를 씻어 낼 수 있는 '배치 타입' 세정 장비가 주력인 회사로, 제우스가 2009년에 인수했다. 이 회사는 지난해 국내에서 공급망 재편 분위기가 조성되자 일본 생산 라인을 경기도 화성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공장 설립을 진행했다. 신공장은 이달 안에 준공될 예정이다. 일본에서 장비 생산을 해 오던 고급 인력들이 한국으로 건너오는 것은 물론 국내 신규 채용에도 나선다.
글로벌 반도체 장비사인 미국 램리서치는 올 하반기 경기 용인시에 R&D센터를 오픈한다. 지난해 한국 투자를 결정한 램리서치는 본격 가동을 위해 R&D 인력을 채용하고 있다. 램리서치는 연 매출 10조원이 넘는 글로벌 반도체 장비사로, 식각 장비 분야의 세계 1위다.
세계적 반도체 업체가 한국에 R&D를 두는 건 극히 이례다. 램리서치에 이어 또 다른 글로벌 장비 업체 A사도 한국에 R&D를 마련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와 협력해 차세대 메모리 반도체 개발 및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서다.
이처럼 국내외 반도체업계에서 한국 진출 및 투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건 지난 2019년 7월 일본의 대 한국 수출 규제 이후부터다. 수출 규제 이전의 소부장 다변화는 원가 절감 목적이 컸다. 그러나 수출 규제가 기업 생존을 좌우하는 과제로 떠오르면서 수입처 다변화, 국산화, 대체 노력이 추진됐다.
이런 절박함은 우리나라 반도체 산업 생태계를 바꾸는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핵심 소재는 물론 소재를 구성하는 원재료까지 일본·중국 등 단일 지역에서 생산될 경우 구매 불가를 공언하고 있다. 양사는 이와 함께 국내외 소부장 기업에 한국 내 생산·공급을 최우선으로 요구, 국내 생산기지 이전과 투자를 촉발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일본 TOK는 일본 정부의 규제 대상에 오른 극자외선(EUV)용 포토레지스트(PR)를 인천 송도로 옮겨 생산, 공급하고 있다.
국산화 노력도 이어지고 있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반도체 양산 라인용 진공 펌프를 제조하는 엘오티베큠은 영국 에드워드, 독일 레이볼드, 일본 시마즈 등 해외 업체가 과점하는 터보(고진공) 펌프 생산에 도전하고 있다. 회사는 국책 과제를 통해 터보 펌프 상용화에 나섰으며, 100% 수입되고 있는 반도체 공정용 펌프 제품 개발도 착수했다. 이 밖에 동진쎄미켐은 삼성전자와 EUV PR, 미코세라믹스는 반도체 장비 핵심 부품인 세라믹 히터 등을 각각 개발하고 있다.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