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팹리스 업체들이 외국 자본에 노출되는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영세하기 때문이다. 한국반도체산업협회가 국내 팹리스 기업 26곳의 2019년 실적을 분석한 결과, 영업적자를 기록한 기업이 13개에 달했다. 순손실을 남긴 곳은 15개로 조사됐다. 국내 팹리스 업체 둘 중 하나는 반도체를 설계해 팔아도 이익을 남기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실적악화는 기업에 위기를 불러온다. 적자가 지속되면 파산에 몰릴 수 있다. 최악의 상황을 피할 방법은 투자 유치, 즉 외부 자본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국내 자본 시장에서 지원을 받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팹리스는 인기가 없다. 장기적인 투자와 지원이 필요해서다. 그나마 기술력을 평가받는 곳이 해외 투자를 받고 그렇지 못한 기업은 퇴출된다. 팹리스 업체 한 임원은 “해외 투자를 받는 건 아주 다행인 경우”라고 말했다.
국내 팹리스가 침체된 건 복합적인 원인이 작용했다. 먼저 기술 및 시장 변화가 영향을 미쳤다. 2000년 초반에는 다양한 멀티미디어 칩 수요로 국내 팹리스 산업이 성장했다. 그러나 스마트폰 등장으로 흡수·통합이 일어났다.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와 같이 고성능·고부가 반도체로 시장이 재편됐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에 대응할 수 있었던 건 대기업, 특히 삼성전자뿐이었다. LG전자도 자체 AP 개발에 도전했지만 실패할 정도로 기술과 자본에서 진입 장벽이 높았다.
이런 가운데 대기업 중심의 수직계열화가 일어났다. 일례로 삼성 디스플레이에 사용되는 디스플레이 구동 반도체(DDI)는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가, LG 디스플레이에 쓰이는 DDI는 LG그룹이 2014년 인수한 실리콘웍스가 공급하는 체계가 됐다. 삼성과 LG의 주력 사업인 디스플레이와의 시너지를 위한 내재화 전략이었지만 이 같은 대기업의 수직계열화는 중소기업 먹거리를 줄어들게 했다.
여기에 중국이 추격에 속도를 내면서 어려움이 가중됐다. 국내 한 팹리스 업계 관계자는 “중국 제조사에 드라이버 IC를 수출하는 회사가 많았는데, 빠르게 성장한 중국 회사가 내수 수요를 차지했다”고 말했다.
결국 중소·중견 기업이 자립할 수 있는 기반 마련이 국내 팹리스 산업 경쟁력을 복원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다. 이런 점에서 대만은 벤치마킹 대상이 될 수 있다.
대만에는 240여개의 크고 작은 팹리스 기업이 있다. 이들은 탄탄한 생태계를 기반으로 해외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대만반도체산업협회에 따르면 대만 회로 설계 분야 매출은 7200억대만달러(약 28조5500억원), 세계 팹리스 시장의 17%를 차지하고 있다. 미디어텍, 노바텍, 리얼텍은 전 세계 팹리스 상위 톱10에 이름을 올렸다.
대만 팹리스 성장 비결의 핵심으로 '분업화'가 꼽힌다. 1987년 파운드리 전문 업체 TSMC가 설립되면서 팹리스도 동반 성장하는 결과를 만들었다. 반도체 설계 업체인 팹리스의 주문에 따른 생산만 전문으로 해 파운드리 분업은 제조 생산성 향상을 가져왔고, 이는 다시 설계 경쟁력 제고 및 설계 부문 분업화로 반도체 산업 전반의 발달을 촉진했다는 분석이다.
한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TSMC의 경우 자국 팹리스에 저렴한 가격으로 파운드리 서비스를 제공해 그들을 먼저 육성하는 전략을 펼쳐왔다”며 “팹리스 성장과 함께 캐시 카우를 확보하고, 미디어텍 같은 대형 팹리스 기업을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대기업과 메모리 중심으로 고착화된 국내 반도체 생태계가 개선되지 않는 한 국내 팹리스가 해외 자본에 매각되거나 종속되는 사례는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익명을 요구한 한 시스템 반도체 업체 대표는 “세계 각국이 반도체 확보를 위해 공급망 재편에 뛰어들고 있는데, 우리나라도 파운드리와 팹리스의 협력을 도모할 시점”이라며 “로우엔드 공정용 IP 확보가 필요한 삼성전자 파운드리와 국내 팹리스가 적극적으로 협력하면 모자란 부분을 보완하면서 서로의 수익을 보장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건일기자 benyun@etnews.com, 강해령기자 kang@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