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급 부족이 야기한 공급망 재편은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계에는 기회였다. 기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제조사 의존적 구조에서 벗어나 미국과 중국 등 판로 다각화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중 반도체 패권 전쟁은 반도체 제조사뿐만 아니라 소부장 기업의 사업 축소를 야기할 수 있다. 반도체 소부장 생태계까지 흔들리면서 산업 전반에 위기가 도래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반도체 장비 업계에서 최대 화두는 반도체 제조사 설비 투자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뿐만 아니라 인텔과 마이크론 등 미국 기업과 중국 메모리·파운드리 업체까지 대규모 공장(팹) 증설에 나섰다. 납기(리드타임) 지연 문제까지 발생, 반도체 장비를 우선 확보하려는 시도가 잇따랐다. 국내 반도체 장비 업체도 수혜를 받아 해외 반도체 제조사에 수출하는 공급 실적을 다수 확보했다.
특히 중국 수출 덕을 톡톡히 봤다. 지난해 국내 반도체 장비 제조사의 대중국 수출은 사상 최대인 22억5800만달러를 기록했다. 반도체 굴기에 나선 중국이 반도체 장비를 대거 사들인 결과 우리나라 장비 기업 매출 증대가 이뤄졌다. 후공정 장비 분야에서 수요가 크게 뛴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추진 중인 반도체 공급망 동맹 '칩4'와 반도체 지원 플러스 법안은 국내 반도체 장비 판로를 가로막을 공산이 크다. 아직 구체화되지 않은 칩4 동맹이 공급망에 역점을 두고 있는 만큼 반도체 장비 업계에 미칠 영향이 막대할 것으로 예상된다. 다른 국가 수출로 대체하기엔 단기적 손실이 크다. 반도체 장비 업계 관계자는 “중국의 신규 시장 창출 효과가 상당히 컸던 만큼 대외 정치적 상황에 따른 시장 축소가 우려된다”면서 “미국이나 대만, 일본 등 시장 진출도 검토해봐야겠지만 녹록하지 않다”고 밝혔다. 대중국 반도체 장비 수출 규모는 미국, 대만, 일본향 수출 규모를 합친 것보다 많다.
반도체 소재에서도 어려움이 예상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자재 가격이 폭등했고 물류 이동이 원활하지 않자 중국산 원자재 의존도가 매우 높아졌다. 반도체 제조 공정에 쓰이는 네온가스와 웨이퍼 제조에 필요한 폴리실리콘이 대표적이다. 최근 주요 원자재 가격 결정권을 중국이 쥐게 되면서 국내 유통에 난항을 겪고 있다.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정도로 가격이 뛰어도 중국 '배짱 장사'에 물량 확보가 쉽지 않다.
최근 중국산 네온가스 2분기 수입 가격은 1분기 대비 6.5배 뛰었다. 실제 유통 가격까지 고려하면 3분기에도 가격 인상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국내 네온가스 수입 중 60~70%는 중국에 의존한다. 폴리실리콘은 중국이 글로벌 시장을 장악, 생산량까지 조정하며 가격을 좌우하고 있다. 우리나라가 칩4 동맹에 가입하거나 반도체 지원 플러스 법안에 따른 중국 설비 투자 제한 시 중국이 반도체 원자재를 무기로 국내 소부장 생태계에 타격을 줄 가능성이 높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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