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웨이퍼 기업들이 대규모 설비 투자에 나선 건 내년부터 예상되는 반도체 출하량 증가에 선제 대응하기 위해서다. 현재는 반도체 시장이 수요가 급감한 혹한기를 지나고 있지만 올 하반기를 지나면서 시장 반등이 예상된다. 여기에 2024년 말은 그간 건설한 반도체 신규 팹(공장)이 대거 가동에 들어간다. 특히 첨단 기술 산업을 주도하기 위해 미국이 끌어들인 파운드리 공장이 본격 운영돼 웨이퍼를 필요로 하는 곳이 더 늘었다. 웨이퍼 공급은 3~4년 안팎의 장기 계약이 관행이다. 이 때문에 주요 수요에 대응하려면 웨이퍼 회사들은 미리미리 안정적인 공급능력, 즉 생산능력을 마련해야 한다.
◇파운드리 앞세운 웨이퍼 수요 급증 전망
반도체 제조사들은 현재 대규모 팹 건설을 추진 중이다. 지금은 세계 경제가 침체를 겪고 있지만 초연결시대 반도체 수요는 지속 증가하고 있어서다.
미국만 하더라도 삼성전자, TSMC 인텔이 2024~2025년 파운드리 팹 가동을 앞두고 있다. 삼성은 미 텍사스주 테일러에 제2 파운드리 팹을 짓고 있다. TSMC는 애리조나 피닉스에, 인텔은 오하이오와 애리조나에 공장을 건설한다.
3~5개 파운드리 팹이 가동을 준비하는 만큼 웨이퍼 수급 대비가 필요하다. 보통 팹(라인) 하나에 월 10만장 수준 회로가 그려진 웨이퍼가 생산되는 걸 고려하면 미국 내 파운드리로만 월 30만~50만장 웨이퍼 신규 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기에 삼성전자 평택 팹, 인텔 유럽 팹을 추가하면 웨이퍼 수요는 더욱 늘어난다. 텍사스인스트루먼트(TI), NXP, ST, 인피니언, 르네사스 등 종합반도체기업(IDM)까지 더하면 2025년 최대 월 100만장에 육박하는 웨이퍼 수요가 발생할 수 있다.
이들 IDM은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 기존 200㎜(8인치) 웨이퍼를 300㎜(12인치)로 전환하는 추세다. 웨이퍼 공급사 주력 제품인 300㎜ 수요가 확대될 전망이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에 따르면 올해 반도체 웨이퍼 출하량은 전년대비 0.6%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방 수요 감소로 반도체 출하가 줄어들고, 그만큼 투입되는 웨이퍼도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상황이 반전될 것으로 예측한다. 2024년 웨이퍼 출하량 성장률은 6.5%, 2025년은 6%의 견조한 성장세를 예상했다.
SEMI는 데이터 센터, 자동차, 산업용 반도체 등 시스템반도체 대한 강력한 수요가 성장을 견인할 것으로 내다봤다. 내년부터 메모리 반도체 시장이 반등할 것이란 전망도 웨이퍼 시장에 호재다.
◇'실탄' 축적한 웨이퍼…투자 체력 충분
지난해 상반기까지 웨이퍼 공급사는 호실적을 거뒀다. 대대적인 반도체 시장 호황 덕분이다. SK실트론은 지난해 상반기에만 영업이익 2778억원을 남겼다. 전년 동기 대비 2배가 넘는 성과다. 일본 섬코 역시 같은 기간 2배가 넘는 흑자를 거뒀다. 신에츠, 글로벌웨이퍼스, 실트로닉 등도 영업이익 증가세를 보였다.
역대급 성과를 거둔 웨이퍼 공급사들은 투자에 나설 체력이 탄탄해졌다. 설비 투자에 쏟아 부을 '총알'이 충분해졌다는 의미다. 기업마다 '조 단위' 투자를 결정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신에츠와 실트로닉은 1조원대, 섬코·SK실트론은 2조원대, 글로벌웨이퍼스는 6조원대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 이들 5개 업체의 총 투자 규모는 10조원 이상이다.
가장 큰 투자를 단행하는 글로벌웨이퍼스 투자는 인수합병(M&A) 무산이라는 변수에 영향을 받았다. 글로벌웨이퍼스는 2020년 말 독일 실트로닉을 37억5000만유로(약 5조원)에 인수하겠다고 밝히고 2021년까지 협상을 진행했다. 그러나 작년 초 독일 정부의 반대로 결국 인수합병은 무산됐다. 독일 반도체 기술 약화가 우려된다는 이유에서다. M&A는 실패했지만 글로벌웨이퍼스는 대규모 자금을 시설 투자로 전환했다. 자금력을 바탕으로 규모의 경제를 본격화할 전망이다.
실리콘 웨이퍼 시장은 일본 신에츠와 섬코가 1, 2위다. 시장조사업체에 따르면 양사 합산 점유율은 50%를 넘는다. 이후 3위 SK실트론, 4위 독일 실트로닉, 5위 대만 글로벌웨이퍼스 순이다. 3~5위 점유율은 10%대다. 투자 및 증설에 따라 시장 판도가 뒤바뀔지 주목된다.
반도체 업계는 앞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이동 제한과 같은 갑작스런 공급사슬이 변화하고 수요 폭발로 제조에 큰 혼선을 빚었다. 코로나는 이제 엔데믹을 향하고 있지만 미-중 갈등과 세계 각국이 반도체 독립을 선언하며 또 다른 새 판을 짜고 있어 실리콘 웨이퍼 산업도 변화를 맞이하는 형국이다.
SK실트론 관계자는 “상위 웨이퍼 공급사 간 시장 점유율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언제든지 시장 순위가 뒤바뀔 수 있다”며 “선제적 투자로 공급 시장 지배력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전개하고 있다”고 밝혔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