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반도체 웨이퍼 기업들이 증설에 일제 나섰다. 전체 수요의 99%를 소화하는 5대 실리콘 웨이퍼 업체들의 투자자금이 10조원을 넘는다. 최근 반도체는 글로벌 경기 침체에 따른 수요 급감으로 최악의 혹한기를 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반도체를 만드는 데 쓰이는 핵심 소재인 실리콘 웨이퍼의 증설은 향후 회복기를 겨냥한 조치다.
9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SK실트론과 일본 신에쓰·섬코, 대만 글로벌웨이퍼스, 독일 실트로닉은 2025년까지 적게는 1조원, 많게는 6조원 이상 설비 투자를 할 계획이다. 신에쓰와 실트로닉이 1조원대, 섬코·SK실트론이 2조원대, 글로벌웨이퍼스가 6조원대다. 이들 5개 업체의 총 투자 규모는 10조원 이상이다.
신에쓰와 섬코는 시장점유율이 50%를 넘는 실리콘 웨이퍼 1, 2위 업체다. 여기에 글로벌웨이퍼스, 실트로닉, SK실트론까지가 톱 5다. 이들 5개사의 점유율은 99%에 이른다. 반도체 웨이퍼 공급 업체 모두가 증설에 나선 것이다.
최근의 반도체 시장 상황을 고려하면 웨이퍼 증설 투자는 낯설다. 반도체 수요가 급감했기 때문이다. 세계시장조사 기관 가트너에 따르면 PC나 스마트폰 등을 만드는 상위 10대 반도체 고객사들의 칩 구매액은 지난해 7.6% 감소했다. 인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거의 모든 반도체 회사들의 실적이 악화했다.
올해도 전망은 밝지 않다.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는 올해 세계 반도체 시장이 지난해 대비 약 7% 줄어들 것으로 내다봤다. 옴디아,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STS), IC인사이츠 등 다른 반도체 관련 협회·단체들도 부정적으로 봤다.
그러나 웨이퍼 업계는 좀 더 장기적 관점에서 시장을 대비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내년 메모리 시장 반등과 올 하반기부터 가동하는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공장을 겨냥하고 있다. 여기에 반도체 제조사의 감산과 설비 투자 축소로 웨이퍼 공급 여유가 있는 지금이 투자 적기라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반도체 소재 업계 관계자는 “반도체 경기는 성장과 둔화 주기(사이클)가 있다”면서 “침체기라 해서 기술과 생산에 투자해 두지 않으면 회복기 경쟁에서 도태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웨이퍼 제조사의 투자가 반도체 시장 반등 시점을 예고하는 지표로 보고 있다. 설비 투자가 시작되고 공장 가동이 본격화되는 1~2년 뒤에 웨이퍼 수요가 급증할 것이란 의미다.
증설 투자 기간 동안 후방 산업도 활기를 뛸 것으로 전망된다. 이미 다수 장비 업체가 웨이퍼 제조사로부터 주문을 받아 제품 공급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관계자는 “지난해까지 웨이퍼 수급난이 발생하고 올해는 반도체 제조사 투입량이 조절되는 등 시장 불확실성이 있다”면서도 “반도체 시장이 회복되고 웨이퍼 공급 업체 시설 투자가 마무리 될 2025년께는 웨이퍼 수급 시장이 안정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 김지웅기자 jw0316@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