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계에는 “국제표준을 선점하는 자가 미래 시장을 지배한다” “최고 기술이 반드시 시장을 선점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국제 표준의 중요성을 분명하게 증명해 준다. 막대한 개발비를 투입해 탄생한 최고 제품이라 하더라도 표준으로 인정받지 못하면 시장에서 퇴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국제표준을 선점하는 것이 미래 시장을 선점하는 지름길이며, 치열해지는 글로벌 경쟁에서 국가 경쟁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방안이다.
2000년대 초반에 우리나라가 세계 디스플레이 시장 1위였음에도 일본은 디스플레이 국제표준을 심의·제정하는 국제전기기술위원회(IEC) 기술위원회(TC) 110에서 의장, 간사, 작업반의 컨비너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의 영향력은 미미한 수준이었고, 업계의 의견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구심점이 없어 국제사회에서 우리 목소리를 반영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는 디스플레이 산업의 수출 경쟁력 강화와 차세대 시장 선점을 위해 2003년 국가기술표준원의 지원 아래 `평판디스플레이 표준화 기반 구축 사업`을 운영하면서 산·학·연 전문가로 구성된 액정표시장치(LCD), 플라스마화상표시장치(PDP),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표준화 분과를 처음 구성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의 체계화된 국제 표준화 활동이 시작됐고, 국제표준으로 미래 시장을 선점할 수 있는 첫 단추를 꿴 셈이다. 현재 우리나라가 신산업으로 지정한 `OLED`가 2003년 국제표준의 첫 성과물이다.
2000년대 초반에 디스플레이 표준을 이끌고 있던 일본은 지금의 OLED를 `유기EL`로 부르며 국제표준을 추진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OLED에 대한 제품 규격을 IEC에 신규 제안했으며, 2003년 12월 디스플레이 국제표준 용어가 우리나라가 제안한 OLED로 확정되는 쾌거를 거뒀다.
현재 우리나라가 대형과 중소형 OLED 세계 시장을 선점할 수 있게 된 원동력으로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OLED 국제표준이 큰 역할을 담당했다. 이뿐만 아니라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각광받고 있는 OLED, 플렉시블, 3D, 터치, 인터랙티브 디스플레이의 경우 협회를 중심으로 국내 전문가 간 표준화 전략 회의를 거쳐 IEC TC 110 산하에 우리나라 주도로 신규 작업반을 구성하고 컨비너직까지 수임하는 등 차세대 디스플레이 표준화 활동의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었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우리의 국제표준 신규 제안이 전무했다. 그러나 디스플레이 국제표준을 우리나라가 주도하면서 15년이 지난 현재 우리나라는 IEC TC 110 산하의 9개 작업반 가운데 4개 작업반의 컨비너직을 수임하고, 진행되고 있는 국제표준 프로젝트 34종 가운데 38%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디스플레이 산업의 국제표준 주도는 우리나라 국제표준 활동의 우수 사례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중국 등 경쟁국에서는 다양한 국제표준 전략으로 한국 디스플레이 산업을 견제하고 있다. 일본은 IEC TC 110의 효율 운영을 위해 구조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중국은 정부 지원을 통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표준화 활동을 적극 전개하면서 최근 몇 년 동안 다수의 표준을 제안, 우리나라와 함께 최다 표준 제안국이 됐다.
치열해지는 국제표준 전쟁 속에서 우리는 디스플레이 산업 세계 1위 자리를 지키기 위해 차별화한 기술을 바탕으로 국제표준 활동을 추진해야 한다. 과거의 제품 경쟁, 기술 경쟁에서 현재의 표준 경쟁으로 변화한 만큼 세계 시장을 선도할 수 있도록 표준화에 대한 정부 지원 지속과 차별화한 국제표준화 전략이 필요하다. 정부는 일반 연구개발(R&D)과 표준 개발 간 근본 차이를 이해하고 국제표준에 적합한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정부 차원에서 산업체의 표준 인식 제고를 권장할 수 있는 제도 장치 마련도 시급하다. 경쟁국의 IEC TC 110 참석자 대부분은 관련 업체 전문가들로 구성돼 자국과 자사 이익을 추구한다.
그러나 한국 전문가는 대부분 대학과 연구소 소속으로 산업 현장 경험이 없어 산업계의 이익 대변이 어렵다. 정부는 현장 경험과 전문 지식을 겸비한 국내 디스플레이 관련 업체 전문가들이 국제표준 활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도록 인식 전환과 제도 지원을 해야 한다. 산업계는 기술 표준 확보가 무한 경쟁시대의 경쟁력이라는 인식으로 국제 표준화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디스플레이 산업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10년 이상 지속한 국내 유일한 산업으로, 지난 10여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를 이끌어 온 근간이었다. 앞으로도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산업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국가 경제의 원동력이 될 것임은 분명하다. 이를 위해 우리나라 디스플레이 국제표준 활동을 강화하고, 나아가 디스플레이 산업 발전을 위해 산·학·연·관 모두가 한마음 한뜻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정노 전자부품연구원 수석연구원(OLED워킹그룹 분과위원장) jnlee123@keti.r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