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터온뉴스 이예은 기자] 이토록 매력적인 1인칭 관찰자 시점의 영화가 있을까. 그것도 조인성의 시점이다. ‘더 킹’은 이미 무수히 많았던 남자들의 정치싸움을 그린 영화가 아니다. 묵직함이 아닌 막무가내로 현대 사회를 완전히 우습게 만들어 버린다.
이 영화는 박태수(조인성 분)의 일대기를 그리며 굳이 서사를 나눈다면 1부, 2부, 3부로 나눌 수 있다. 80년대를 배경으로 한 1부는 본격적으로 ‘더 킹’으로 들어가기 전, 프리퀄이다. 만화를 연상시킬 정도로 극적인 설정들이 다수 포진해있다. 목포 출신의 양아치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박태수 역시 양아치 학생으로 생활을 이어간다. 어느 날, 제일 강해보였던 아버지가 검사에게 당하는 걸 보고 즉각 검사를 꿈꾼다. 하지만 재미있는 건 뻔한 ‘복수’같은 신파적 이유가 아니라, 단순히 저게 ‘힘’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태수는 공부를 시작한다. 그런데 시끄러운 곳에 있으면 공부까지 잘 되는 특이 체질까지 갖추고 있어, 서울대 입성까지 성공한다.
거기다 자신의 선택이 아닌 여자친구로 인해 민주화 운동으로까지 개입이 되어 군대로 끌려가게 되는 등 온갖 영화적 설정들을 두루 갖춘 박태수는 기어코 검사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꿈꿔오던 국가를 쥐락펴락할 만한 힘 있는 검사가 아닌, 일주일에 150건 씩 소소한 사건들만 급하게 처리하며 지낸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사건에 분노할 줄 아는 나름의(?) 소신을 갖췄다.
하지만 어느 한 사건을 통해 한강식(정우성 분)을 마주하고, 내면에 있는 욕망을 일깨운다. 사악하기보다는 꼭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천진하게 그려진다. 1% 검사의 길로 들어선 2부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매일 뉴스를 보는 우리에게 이제는 익숙한 내용들이다. 입맛대로 언론을 지휘하고 수사를 기획하며 원하는 이미지와 결과를 얻어내고,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면서 그 과정들을 지켜보는 권력의 우두머리들. 심지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굿까지 벌여가며 올바른(?)라인을 타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고 있자면 우습기 짝이 없다.
3부는 절정부터 결말까지 스피디하게 진행된다. 절대적 한 편이 없는 권력 세계를 경험한 박태수의 각성으로 판은 뒤집히는데, 그마저도 옳음을 깨달아서 개과천선형 복수와 같은 진부한 전개는 아니다.
대한민국의 30년을 훑는 오프닝부터 전개 내내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故노무현 전 대통령, 故김영삼 전 대통령, 故 김대중 전 대통령 등과 같은 실존 인물과 사건들은 ‘더 킹’이 철저하게 실재 위에 올라서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영화에는 선인이 없다. 약한 자들의 사연을 구구절절 읊지도 않으며 오로지 악인만 있다. 대신,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자들이 즐기는 ‘밑바닥스러운’ 쾌락 행위를 실컷 조롱한다.
배우들은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으로 착각이 들만큼 풍자에 탁월한 연기를 선보였다. 시종일관 우아하게 폼을 잡던 정우성은 번뜩 뜬 눈으로 정신없이 춤과 랩을 구사하면서 권력에 미친 검사를 한낱 우스갯거리로 만들어버린다. 조인성은 극 전체를 내레이션으로 이끌고 가며 80년대의 박태수부터 천진하게 권력에 눈이 먼 박태수까지 어느 부분 하나 어색하지 않게 입체적으로 표현해냈다. 밝은 검사들 저편에서 어둠으로 존재하는 조폭 최두일을 연기한 류준열도 튀지 않게 자연스레 그들 무리에 스며들었다.
예상치 못하게 빛을 발하는 건 김소진이다. 그녀는 추악한 남자 권력자들 속에서 짧지만 날카롭게 파고들며 신스틸러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극중 유일하게 주체적인 힘을 지닌 여성 캐릭터이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 힘이 희미해진 게 아쉬움으로 남는다.
‘사회정치 비판’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내부자들’과 간혹 비교 선상에 오르기도 하지만 완전히 다르다. 폼, 멋짐, 잔인함과는 거리가 멀다. 한재림 감독이 의도한 대로 흥겨운 마당놀이 한 판을 보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뒤에 울림은 마냥 가볍지만은 않다.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까지 하게 한다. 사람에 따라, 관람 중 드문드문 눈물을 흘릴 만한 시퀀스도 적지 않다.
당하면 반드시 복수해야하는 ‘정치 엔지니어링’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해낸 블랙코미디 작품으로, 우주의 기운이 ‘더 킹’으로 향했다고 생각될 정도로 현 시국에 제격인 영화다. 마지막에는 관객과 국민에게 판단을 바라는 대범함까지 갖췄다. 134분의 러닝타임으로 길다면 길지만, 세련된 편집과 훌륭한 은유의 향연은 그 시간을 체감하지 못하게 돕는다. 1월 18일 개봉 예정.
전자신문 엔터온뉴스 이예은 기자 9009055@entero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