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정부가 일본의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수출 규제에 대응해 세계무역기구(WTO) 제소를 포함한 모든 조치를 강구한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1일 오후 수출상황 점검회의에서 “일본의 수출제한 조치는 WTO 협정상 원칙적으로 금지될 뿐만 아니라, 지난주 G20 정상회의 합의 정신과도 정면으로 배치된다”며 “우리 정부는 WTO 제소를 비롯해 국제법과 국내법에 의거, 필요한 대응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일본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생산에 차질을 빚을 수 있는 3개 핵심 소재에 대한 한국 수출 통제 방침을 밝힌 것에 따른 즉각 대응 조치다.
성 장관은 “오늘 일본 정부가 발표한 수출 제한 조치는 우리나라 대법원 판결을 이유로 한 경제보복 조치이며, 상식에 반하는 조치라는 점에서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앞으로 업계와 긴밀히 소통해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지원에 만전을 기하고, 우리 부품소재장비 경쟁력을 제고하는 계기로 삼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오는 4일부터 불화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의 한국 수출과 제조 기술 이전에 대해 포괄적 수출 허가제도 대상에서 제외하고 개별 수출 허가 신청으로 전환한다고 1일 밝혔다.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는 반도체 제조 공정에 쓰이는 핵심 소재다. 불화폴리이미드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액정표시장치(LCD) 등 디스플레이에 쓰인다. 불화폴리이미드와 포토레지스트는 세계 전체 생산량의 90%, 불화수소는 약 70%를 일본이 점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그동안 이들 소재의 대 한국 수출 시 허가 신청 면제 등 우대 조치를 했지만 이제는 수출할 때마다 심사하겠다는 것이다. 신청 및 승인에는 90일이 걸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산업성은 또 한국을 외국무역법상의 '화이트국가'에서 제외하기 위한 의견 모집 절차를 시작한다고 덧붙였다.
화이트국가는 안전보장상 우호국으로 인정돼 첨단 재료 수출과 관련 절차가 간소화된다. 대상에서 제외되면 이 역시 일본 정부 당국의 승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일본은 8월 중 시행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화이트국가로 지정한 나라는 미국과 영국 등 27개국이다. 우리나라는 2004년에 지정됐다.
일본에서 이들 소재의 수출을 제한하면 국내 산업계는 영향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4일부터 규제를 받는 포토레지스트와 불화수소는 반도체 제조에 필수 소재여서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직접 피해를 볼 수 있다. 포토레지스트의 경우 국산화 및 대체재가 부족해 일본으로부터 수입이 이뤄지지 않으면 당장 생산에 차질을 빚게 된다. 불화폴리이미드 역시 디스플레이 제조에 폭넓게 쓰이고 있어 삼성디스플레이나 LG디스플레이가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일본 정부는 이번 조치에 대해 “(양국 간) 신뢰 관계가 현저히 훼손됐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제 강제징용 문제에 대한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해석됐다.
일본은 한국 정부를 압박하는 동시에 보복 강도를 높이기 위해 반도체와 디스플레이를 타깃으로 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도체는 우리나라 총수출의 20%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이다.
이번 조치는 일본 정부가 주창한 '자유롭고 공정하며 무차별적인 무역 원칙'과 정면 배치되는 것이어서 국제 사회의 비판이 고조될 가능성이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D램 시장점유율은 70% 이상이고 낸드플래시 시장점유율도 40%가 넘어 생산 차질 시 전 세계 정보기술(IT) 산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안이다. 일본 기업 자체는 물론 미국·중국 경제에도 파장이 미칠 수 있는 이슈다.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도 “이번 조치로 일본 수출 기업들도 영향을 받을 우려가 있다”며 한·일 양국 관계가 한층 악화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리 정부는 즉각 긴급 대응 방안 마련에 나섰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오전 7시 30분 서울 모처에서 비공개 장관회의인 '녹실회의'를 열고 일본의 수출 규제 발표 관련 대응 방안을 논의했다.
윤건일 전자/부품 전문기자 benyun@etnews.com, 이경민 산업정책(세종)전문 기자 kmlee@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