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격 경쟁력·협력 생태계 승부수
엔비디아, 칩 개발주기 단축나서
HBM 합종연횡에 SK·삼성 주목
인공지능(AI) 반도체 전쟁이 '2라운드'에 진입했다. 인텔과 AMD가 시장 선두인 엔비디아와의 경쟁을 위해 '가격 경쟁력'과 '협업'이라는 승부수를 던지며 반격에 나섰다.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칩 개발 주기를 단축, 후발주자와의 격차 벌리기에 돌입했다.
4일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IT 전문 전시회 '컴퓨텍스'에서는 AI 반도체 칩 패권을 쥐려는 기업 간 경쟁이 한층 치열해지고 있음을 확인했다.
팻 겔싱어 인텔 CEO는 이날 신형 AI 반도체 가우디 3의 가격을 공개했다. 가우디 3는 올 하반기 출시 예정인 인텔의 대표 AI 제품이다. 8개의 가우디3 칩과 범용 베이스보드(UBB)를 포함한 키트 가격은 12만5000달러로, 인텔은 “동급 경쟁 모델 대비 3분의 2 수준의 가격”이라고 강조했다. 경쟁 모델은 엔비디아 H100이다.
AI 반도체 기업이 제품 가격을 공개한 건 이례다. 가격이 비싼 엔비디아 제품을 겨냥한 것으로, 가격 경쟁력을 앞세워 AI 반도체 수요 시장에 빠르게 침투하려는 복안으로 풀이된다.
인텔은 공급망 기업과의 '동맹'도 핵심 승부수로 활용했다. 겔싱어 CEO는 컴퓨텍스 개막 하루 전 주요 공급망 회사 대표를 초청, 만찬을 진행했다. 폭스콘·페가트론·컴팔일렉트로닉스·인벤텍·기가바이트 등 대만 소재 PC 및 서버 제조사들이 참석했다. AI 반도체 칩 협력사들로, 최종 고객인 데이터센터로 이어지는 공급망 중간 단계에 있는 회사들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대만은 AI 반도체 핵심 유통 공급망이자 고객사인 PC 및 서버 제조사가 다수 포진해 있다”며 “기존 PC 중심의 전시회였던 컴퓨텍스에 글로벌 AI 반도체 리더들이 총출동한 것 역시 이같은 생태계 주도권을 쥐려는 전략”이라고 평가했다. 인텔 CEO가 컴퓨텍스에 참여한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AMD 역시 내년에 출시할 차세대 AI 반도체 칩 'MI350' 로드맵을 공개함과 동시에 협력 생태계를 부각시켰다. 리사 수 CEO가 마이크로소프트(MS)·HP·레노버·에이수스 등 전략적 파트너를 직접 언급했다.
엔비디아에 뒤를 쫓는 인텔과 AMD가 새로운 카드를 던진 건 AI 시장 탈환을 주 목적으로 풀이된다. 엔비디아는 AI 반도체 시장 80% 이상을 차지할 만큼 영향력이 막강하다. 엔비디아와 한판승부를 펼치려면 차별화 전략이 필요한데, 가성비와 협력 생태계를 낙점한 것으로 분석된다.
엔비디아는 수성에 나섰다. 앞서 2일 저녁 사전 기조연설을 진행한 젠슨 황 엔비디아 CEO는 내년 선보일 차세대 AI 반도체 칩(플랫폼) '루빈'을 공개했다. 지금까지 2년 단위로 AI 칩을 내놓았던 엔비디아가 전략을 수정, 1년 주기로 제품 출시를 앞당기기로 했다고 강조했다. AI 저변 확대에 대응, 기술 고도화 속도를 높이려는 전략이지만, 후발주자들의 '탈(脫) 엔비디아' 공세도 의식한 것으로 풀이된다.
AI 반도체 기업 간 치열한 경쟁은 한국 반도체 업계에도 만만치 않은 영향을 줄 전망이다. 특히 이번 컴퓨텍스는 고대역폭메모리(HBM) 시장을 둘러싼 '합종연횡'을 예고한 자리였다.
우선 엔비디아가 차세대 HBM인 HBM4를 내년 출시할 AI 반도체 칩에 전격 탑재할 것이라고 최초 공개했다. 현재 SK하이닉스와 미국 마이크론으로부터 HBM을 납품 받는 엔비디아가 차기 제품에 어떤 공급망을 가져갈지 초미의 관심사다.
AMD는 삼성전자와의 협업 가능성이 유력하다. 회사는 내년 HBM3E를 본격 적용할 방침인데, 업계에 따르면 지금까지 협력 네트워크를 이어온 삼성전자 제품을 탑재할 것으로 전해진다. 인텔은 HBM 공급망을 구체적으로 공개하지 않았지만, 향후 AI 반도체 칩 생산이 늘면 HBM 수요도 확대될 것으로 관측된다.
업계 관계자는 “지금까지 SK하이닉스가 AI 반도체용 HBM 시장을 주도해왔지만, 주요 고객들이 공급망 다각화를 시도할 가능성이 크다”며 “이 때문에 자사 제품이 채택되기 위한 SK하이닉스·삼성전자·마이크론 간 경쟁도 불가피할 것”이라고 밝혔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