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선 결과에 따라 국내 반도체·이차전지 산업 불확실성이 커졌다. 국내 기업의 미국 진출을 유인했던 '반도체 지원법(칩스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입장이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지원법과 IRA법 폐지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불확실성이 커진 만큼 기업의 대미 투자 전략에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분석했다.
트럼프 당선인은 앞서 “매우 나쁜 거래”라며 반도체 지원법을 평가 절하했다. 미국 내 반도체 생산능력을 키워 중국 반도체 굴기를 견제하려는 목적이지만, 외국 기업 투자 유인책으로 보조금을 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반도체 지원법으로 미국에 투자하는 반도체 기업에 생산 보조금 390억달러(약 54조원)과 연구개발 지원금 132억달러를 보조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삼성전자가 64억달러, SK하이닉스가 4억5000만달러 보조금 지급이 결정됐다. SKC 역시 반도체 유리기판 제조로 7500만달러를 받기로 하는 등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계로서는 통큰 미국 투자 유인책이었다.
반도체 보조금에 부정적인 트럼프 당선인이 법안을 수정하거나 폐지하면 미국 진출을 추진 중인 우리 기업에는 직격타가 될 수 있다. 현지 인건비와 인력 확보 어려움, 국내 투자 외면이라는 난항에도 미국 시장에 뛰어든 동력이 사라질 수 있다. 미국에 투자 중인 한 반도체 기업 고위 관계자는 “무엇보다 보조금을 못받게 되는 것이 가장 우려된다”며 “미국 투자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줄어들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만 반도체 지원법의 폐지는 어려울 것이란 게 전문가 시각이다. 박승배 미국 뉴욕주립대 교수는 “미 의회에서 통과한 법을 쉽게 바꾸거나 폐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며 “반도체 지원법이 효력을 발생하는 기간 동안에는 큰 변화를 주기 힘들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 반도체 지원법 유효 기간은 2027년까지다. 미국 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미국 대표 양당 간의 공감대도 이같은 전망에 힘을 싣는다.
그러나 불확실성은 여전하다. 아직 우리 기업의 보조금 지급 계약이 체결되지 않은 만큼 이를 주도하는미 상무부 중심의 태도 변화도 배제할 수 없다. 보조금 규모를 축소하는 등 조치가 있을 경우, 트럼프 당선인의 엄포가 현실화될 수 있다. 특히 미국 기업 보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TSMC 등 외국 기업 대상으로 지원 정책 수정 가능성도 상존한다. 트럼프 당선인은 보조금 대신 관세를 통해 미국 투자를 유인하는 방안을 주장하고 있다.
실제 보조금 지급에 변화가 있다면 우리 기업들의 투자 전략도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관측된다. 미국 현지 투자 규모를 줄이는 방안이 유력하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보조금 규모나 투자 환경이 불리하게 작용되면 미국 투자 전략을 수정해야할 것”이라며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국내 배터리 업계 긴장감도 높아졌다. 트럼프 당선인이 IRA 폐기 또한 공언해왔기 때문이다. IRA에서 배터리 업계에 핵심 영향을 미친 것은 미국 내에서 제품을 생산하는 사업자에게 지급되는 첨단제조생산 세액공제(45X)와 소비자에게 제공되는 전기차 구매자 세액공제(30D) 규정이다.
특히 업계는 45X를 주목한다. 배터리 셀은 kwh당 35달러, 모듈은 kwh당 10달러를 환급해주는 제도다. 국내 배터리 업체가 현지 투자를 확대하는 동력이다. 혜택이 사라질 경우 투자 계획과 가동 일정이 연기되거나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영업손익에도 부담으로 작용한다. 지난 3분기에만 LG에너지솔루션과 SK온은 IRA 세액공제 혜택으로 각각 4660억원과 608억원 수혜를 받았다.
소비자에게 최대 7500달러까지 지급되는 세액공제(30D)가 축소되면 전기차 보급 속도가 지연, 배터리 업계에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다만 배터리 업계는 인센티브 축소가 불가피할 것으로 보면서도 IRA를 전면 폐지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으로 관측한다. 배터리 관련 투자가 조지아, 켄터키, 테네시, 미시간 등 공화당 우세 지역에 몰려있어 이해관계도 작용할 것이란 분석이다. 공화당 하원의원 18명과 의장이 IRA 폐지 반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대표는 최근 배터리 산업의 날에서 “생산자 보조금에는 큰 변동이 없겠지만 소비자 세액공제 혜택에는 변화가 있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전현욱 SK온 IR 담당도 컨퍼런스콜을 통해 “IRA 전면 폐지는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며 전기차 보조금 축소나 예산 제한 등 보조적 조치 가능성이 높아보인다”고 내다봤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