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코리아 1.0]기술입국 씨앗을 뿌리다

1980~1990년대는 이전 시대 정치·경제·사회적 혼란을 종식하고 국가 안전과 삶의 질 향상이 시대적 화두가 됐다. 당시 전두환, 김영삼 정권을 거치면서 기존 경제 성장에 치중했던 정책에서 탈피해 근본적으로 국가 발전을 이끌 수 있는 동인 발굴이 집중적으로 추진됐다. 정부의 강력한 정책과 기업의 과감한 연구개발(R&D) 투자로 기술입국 씨앗을 뿌리게 된다.

[테크코리아 1.0]기술입국 씨앗을 뿌리다

◇과학기술 기반 경제부국 닻 올리다

1981년 7월 발표된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1982~1986년)'은 과학기술과 기술혁신을 활용해 경제 성장을 이끌어야 한다는 인식 전환 시발점이 됐다. 1982년 정부가 처음으로 대규모 연구과제에 집중 투자하는 특정연구개발사업까지 착수하면서 전자 산업화는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정부의 강력한 과학기술 지원 속에 1980년 2117억원이었던 우리나라 R&D 투자는 1985년 1조2371억원으로 크게 늘었다. 이 가운데 민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1980년 36.1%에서 1985년 75.2%까지 뛰었다. 기업 부설 연구소는 1981년 53개에서 1988년 604개로 10배 이상 늘었다.

1984년 삼성전자 64K D램 해외 첫 출하 기념식.
1984년 삼성전자 64K D램 해외 첫 출하 기념식.

◇반도체 신화 시작되다

1983년 2월 고 이병철 삼성 회장이 발표한 반도체사업 투자 방안은 반도체를 국가기간 산업으로 성장시키는 역사적 사건으로 꼽힌다. 이후 삼성전자는 1K, 4K, 16K D램을 건너뛰고 64K D램을 개발한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삼성전자는 64K D램 반도체를 개발 선언 6개월 만인 1983년 11월 시장에 처음 공개했다. 여세를 몰아 256K, 1M, 4M D램을 연이어 개발하며 반도체 사업 진출 6년 만에 글로벌 대표 기업으로 우뚝 섰다.

삼성전자는 '꿈의 반도체'로 불리는 G급 D램 부문에서도 1996년 선폭이 0.18㎛인 1G D램 개발에 성공한 데 이어 2001년에는 선폭이 0.13㎛인 4G D램 시제품까지 내놨다. 64M, 256M, 1G, 4G D램까지 4세대를 연속해서 개발한 기업은 삼성전자가 최초다. 1995년 이후에는 64M D램까지 개발하면서 최고 반도체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1981년 국내 최초 PC 탄생

우리나라 개인용 컴퓨터 시장은 중소기업이 키웠다. 삼보컴퓨터는 1981년 애플Ⅱ를 복제해 국내 최초 PC를 제작했다. 이후 1982년 금성사, 1983년 삼성전자와 대우통신이 PC 제조를 시작했다.

1980년 중반부터 국내 업체들은 IBM 등 외국기업과 주문자상표부착(OEM) 계약을 맺고 해외시장까지 진출, 고도 성장단계로 진입했다. 우리나라 컴퓨터 생산액은 1986년 8억8100만달러에서 1989년 32억2400만달러로 3년간 연평균 80%가 넘는 성장세를 기록했다.

국내 최초 전전자 교환기 TDX-1
국내 최초 전전자 교환기 TDX-1

◇최대 국책사업 'TDX 개발'과 세계 첫 CDMA 상용화

1980~1990년대는 우리나라가 통신 강국으로 우뚝 서는 전기를 마련한 시기다. 정부는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을 수립하면서 '1가구 1전화' '광역자동화' 달성을 통신 부문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야심찬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우리 정부는 1982년부터 5년간 약 240억원을 투입, 시분할교환(TDX) 기술개발 사업을 본격 추진했다. 1993년 한국전자통신연구원(ERTI)가 구심점이 돼 금성반도체, 대한통신, 동양정밀, 삼성반도체 등이 힘을 합친 결과 국내 최초 전전자 교환기인 TDX-1를 개발, 1986년부터 전국에 보급해 국산화에 성공한다.

TDX 개발 사업에 자신감을 얻은 정부는 1989년부터 CDMA 표준을 기반으로 디지털 이동통신시스템 개발사업을 추진했다. ETRI는 TDX 기술개발사업 경험을 토대로 삼성전자, 금성정보통신, 현대전자, 맥슨전자와 힘을 합쳤다. 투입된 예산은 996억원, 인력은 1042명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 국책사업이었다. 약 7년간 노력 끝에 1996년 세계 최초로 CDMA 방식 이동통신서비스를 제공하며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통신강국으로 거듭났다.

◇삼성 '애니콜' 등장…LG도 '화통'으로 대응

삼성전자는 1989년 5월 국내 최초 휴대폰 'SH-100'에 이어 1992년 후속작 'SH-300'까지 출시했지만 통화 음질에 발목이 잡혀 당시 시장 1위 모토로라를 넘어서지 못했다.

고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신경영 회의'에서 모토로라에 필적하는 휴대폰 생산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이렇게 탄생한 제품이 1994년 10월 출시한 'SH-770'이다. '애니콜'이라는 브랜드를 단 이 제품은 '한국 지형에 강하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승부를 건 결과, 출시 1년도 채 안 돼 모토로라를 따돌리고 시장 1위로 올라서는 일등공신이 됐다.

이에 맞서 1995년 2월 LG정보통신도 빌딩이 많은 도심에서 강하다는 '화통'이라는 제품을 출시하는 등 2000년대 우리나라가 글로벌 휴대폰 시장에서 선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삼성전자 10.4인치 TFT-LCD
삼성전자 10.4인치 TFT-LCD

◇세계시장 주도하는 韓 디스플레이 탄생

삼성전자 특수사업부는 새로운 LCD로 부상한 TFT-LCD 개발에 도전, 1992년 7월 국내 최초로 10.4인치 TFT-LCD 개발에 성공했다. 1993년 12월부터 1995년 2월까지 1941억원을 투입, 월 2만매 가판을 처리할 수 있는 양산 1라인을 기흥에 건설하며 사업화에 박차를 가했다. LCD 양산을 개시한 지 2년 만에 매출 3억달러는 돌파하는 성과를 거두며 글로벌 5위권 LCD 업체로 성장하는 기염을 토했다.

LG전자 역시 1993년 LCD사업부를 신설한 뒤 1999년 1월 국내 최초 LCD 전문업체인 LG LCD를 출범했다. 같은 해 11월 글로벌 기업인 필립스와 합작해 LG필립스LCD를 설립, LCD 사업에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했다. 이를 통해 LG필립스LCD는 1999년 말에는 삼성전자에 이어 세계 2위 LCD 업체로 성장했다.


<1980~1990년대 주요 연혁>

[테크코리아 1.0]기술입국 씨앗을 뿌리다


정용철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