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는 한국전쟁 이후 최대 국가 위기로 평가될 정도로 나라 전체를 휘청거리게 했다. 고속 성장을 거듭해 온 우리나라 전자산업도 이를 기점으로 전반적인 체질 전환이 요구됐다. 뼈를 깎는 노력 끝에 2000년대 들어 대기업 경영 체질이 건전화되고 벤처 붐이 싹 트면서 본격적인 민간 주도 기술 선도 체계가 마련됐다. 세계 시장을 석권하는 국내 기업이 탄생하는 등 글로벌 무대에서 한국의 위상은 높아져만 갔다.
◇반도체 신화, '트리플 크라운'으로 완성
1990년대 삼성전자는 D램을 포함한 메모리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주도했지만 지속 가능성에 의문이 뒤따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삼성은 세계 최초로 출시한 DDR D램처럼 고부가가치 D램 개발에 주력하는 동시에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 진출을 적극 모색했다.
삼성전자는 낸드 플래시메모리 개발에 뛰어들어 1993년 16M, 1996년 64M, 1998년 128M, 1999년 256M, 2000년 512M 낸드 플래시메모리를 성공적으로 출시했다. 이후 2001년 1G를 시작으로 매년 진화를 거듭해 2006년 64G 낸드 플래시 메모리를 세계 최초로 출시하는 성과를 거뒀다. 기술 성과에 힘입어 글로벌 낸드 플래시메모리 시장 점유율을 2001년 27%에서 2002년에는 45%까지 끌어올리면서 세계 1위를 차지한데 이어 2003년에는 70%까지 치고 올라갔다.
삼성전자는 1992년 D램 1위와 1995년 S램에 이어 2003년 플래시메모리까지 선두에 오르며 반도체 분야에서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韓, LCD 대형화 선도…세계시장 석권
2000년대 들어 액정표시장치(LCD) 시장은 노트북, 모니터에 이어 대형 TV와 컴퓨터 모니터로 확대됐다. 이 추세에 맞춰 삼성과 LG도 대형 LCD 개발에 집중했다.
LG필립스LCD가 2000년 5월 국내 최초로 4세대 생산라인(680㎜×880㎜)을 가동한 이후 2002년 5월에는 세계 최초로 5세대 생산라인(730㎜×920㎜)까지 구축 완료했다. 당시 경쟁관계였던 삼성과 격차를 벌리기 위해 2004년 6월에는 6세대 생산라인(1500㎜×1850㎜)을 가동하며 세대 선점을 이어갔다.
삼성전자는 6세대를 뛰어 넘어 7세대 생산라인(1870㎜×2200㎜) 구축이라는 중대 결정을 내렸다. 이를 위해 2004년 3월 소니와 7세대 TFT-LCD를 생산하는 합작사 S-LCD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어 충남 아산시에 7세대 생산라인을 구축, LG를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LG필립스LCD도 7개월 뒤인 2006년 1월 1950㎜×2250㎜ 규격 7세대 라인을 경기도 파주에 구축하면서 대형 LCD 영역은 우리 기업이 세계 시장을 주도하게 된다.
◇휴대폰 대중화…세계 최초 경쟁 주도
1996년 한국에서 CDMA 이동통신 기술이 세계 최초 상용화되면서 국내 휴대폰 산업도 급속도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특히 2000년에 'CDMA 2000'이라는 초고속 데이터 통신서비스가 국내 도입되면서 휴대폰은 인터넷, 음악, 카메라 등 다기능을 구현하는 만능 기기로 진화하기 이르렀다.
삼성전자는 2000년 세계 최초로 내장형 카메라 폰을 출시하며 '화소 경쟁' 불을 지폈다. 2000년 6월 35만 화소(삼성전자), 2003년 10월 130만 화소(팬텍), 2004년 10월 500만 화소(삼성전자), 2005년 3월 700만 화소(삼성전자), 2006년 10월 1000만 화소(삼성전자)까지 우리 기업이 카메라 폰 시장을 주도했다.
휴대전화 사용 고객이 젊은 층으로 이동하면서 이들을 겨냥한 제품도 봇물을 이뤘다. 삼성전자는 2003년 TFT-LCD를 채택한 일명 '이건희폰(SH-T100)'을, LG전자는 2004년 외장 안테나를 제거한 벤츠폰(SGH-E700)과 2007년 세계 최초로 터치 스크린을 적용한 프라다폰(LG-KE850)을 내놨다. 또 '휴대폰 TV시대'를 맞아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위성 DMB폰인 'SCH-B100'을 선보였고, LG전자는 회전형 위성 DMB폰(LG-SB120)과 타임머신 탑재 위성 DMB폰(LG-SB130)을 세계 최초로 출시했다.
◇자동차·조선, 글로벌 시장서 꽃 피우다
현대기아자동차는 1990년 후반에 품질경영과 세계화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이런 노력 끝에 얻은 첫 결실이 바로 '세타엔진'이다. 현대기아차가 2000년 4월부터 2004년 8월까지 1740억원을 투입해 개발한 이 엔진은 소음과 진동을 줄이는 동시에 세계 최초로 간접 공기량측정 방식을 이용해 흡배기를 조절할 수 있게 설계됐다. 현대기아차의 엔진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 받는 첫 계기가 바로 세타엔진이었던 것이다.
세타엔진은 한국 자동차 역사 최초로 선진국에 기술수출한 사례이기도 하다. 세타엔진은 현대기아차, 크라이슬러, 미쓰비시가 주도한 세계엔진제조연합(GEMA) 표준으로 채택됐다. 크라이슬러, 미쓰비시로부터는 5700만 달러의 기술료도 받았다.
1997년 외환위기로 원화환율이 큰 폭으로 상승한 것은 국내 조선업계에 기회로 작용했다. 가격 경쟁력은 물론 환차익까지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 조선시장이 연간 2200만~3700만 톤에 이르는 수주 물량이 지속적으로 쏟아지며 호황을 누림에 따라 우리 조선업체들도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은 2001년을 제외하고 1999~2007년 수주량 기준 세계 시장 점유율 30~40%대를 기록, 선두를 유지했다. 2006년 9월에는 글로벌 조선 수주잔량 기준 세계 10대 조선업체 중 우리 기업이 7곳이나 포함될 정도로 시장을 주도했다.
정용철기자 jungyc@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