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반도체 한파를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세계 경기 악화로 소비 심리가 급격히 위축되면서 반도체 전방산업의 침체가 지속되기 때문이다. 메모리와 시스템 반도체 모두 높은 성장률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설비 투자 축소로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업계도 '보릿고개'를 넘어야 한다. 내년 하반기를 지나야 시장 반등이 점쳐진다. 전문가들은 시장 회복 후 치열한 경쟁이 예상되는 만큼 연구개발(R&D) 역량 강화에 주력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반도체 시장 역성장…메모리 직격탄
시장조사업체는 2023년 반도체 시장이 역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가트너는 올해 대비 반도체 시장이 3.6%, 세계반도체시장통계기구(WTST)는 4.1% 각각 축소될 것으로 내다봤다. 반도체 수요 핵심은 모바일(스마트폰), 서버, PC, 가전 등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미-중 무역 갈등, 높은 인플레이션으로 소비자가 지갑을 닫은 상황이다. 스마트폰은 교체 주기로 올해보다 좀 나아지겠지만 PC와 가전은 신규 수요가 많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데이터 처리량 급증으로 서버 시장은 반도체 핵심 전방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경기 악화로 주요 데이터센터 기업이 투자를 머뭇거리고 있어서 1~2분기까지 설비 투자 유예 또는 축소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트렌드포스가 지난 10월에 예측한 2023년도 서버 출하량 증가율은 올해(5.1%)보다 낮은 3.7%이었다. 트렌드포스는 1개월 만에 2.8% 성장으로 낮춰 잡으면서 서버 시장의 한파를 예고했다. 메모리 중심 한국 반도체 기업이 직격탄을 맞은 가운데 현재 D램과 낸드플래시 재고량은 14~17주 수준인 것으로 알려졌다. 메모리 가격 인하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수익 악화와 이에 따른 투자 축소는 불가피하다. 반도체 장비 업계에는 이미 제품 주문 취소와 연기 사례가 속속 발생하고 있다.
◇시스템 반도체·패키징마저 하락세
성장세를 이어 온 시스템 반도체 시장도 한풀 꺾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올 3분기 세계 10대 반도체 팹리스(설계 회사) 매출은 전 분기 대비 5.3% 감소했다. 4분기와 이듬해 1분기는 시스템 반도체 핵심 수요처인 스마트폰·PC·가전 부문의 성수기지만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으로 수요 증가폭이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시스템 반도체도 재고 조정 기간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시스템 반도체의 성장 한계로 패키징 시장도 연쇄 축소가 우려된다. 글로벌 후공정(OSAT) 업체들이 이미 내년도 설비 투자 축소를 예고했다. 국내 OSAT 기업 다수가 메모리 패키징에 집중하는 만큼 수익은 더욱 악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 OSAT 업체 관계자는 “메모리 중심 국내 후공정 산업 구조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면서 “시스템 반도체 쪽 사업 비중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차량용 반도체·파운드리 투자 '희망가'
자동차 전동화와 전기차 시장 확대로 차량용 반도체 시장은 '나 홀로 성장'이 예상된다. 내년 신차 판매량은 8170만~8530만대 수준으로 올해 대비 최대 4.7% 증가할 것으로 전망된다. 전기차 침투율이 증가하면서 차량용 반도체 탑재도 견인하고 있다. 주요 파운드리 기업의 공장(팹) 투자 또한 가뭄 속 단비 역할을 하고 있다. 삼성전자, TSMC, 인텔 등이 2024~2025년 가동을 목표로 팹 건설을 진행하고 있다. 이르면 내년 상반기부터 주요 소부장 발주가 시작될 것으로 예상된다. 선행 투자가 필요한 일부 소재·부품 업체는 이미 대응에 나섰다. 백홍주 원익QnC 대표는 “2024년을 안팎으로 반도체 소재·부품 수요가 폭증할 것으로 예상한다”면서 “이에 대응한 설비 투자를 서두르지 않으면 대응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파운드리 점유율이 낮은 국내 장비 업계엔 큰 수혜가 돌아가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 ASML, 램리서치, TEL 등 글로벌 상위 4개 업체가 파운드리 장비 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내년 3~4분기가 턴어라운드 시기다. 인텔 신규 서버용 중앙처리장치(CPU) 출시가 내년 초로 예고되면서 DDR5 D램 신규 수요가 예상된다. 데이터센터 검증 작업 등 시간을 고려하면 하반기에 매출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중국 코로나 완화 정책으로 소비 심리가 살아날 경우 중국 시장에서 전방산업 회복이 반도체 시장 성장을 견인할 공산도 크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은 “반도체 불황에는 설비 투자는 줄어들지만 연구개발(R&D) 투자는 지속돼 호황기로 들었을 때 경쟁 우위를 차지하는 기회를 잡게 된다”면서 “기업 전략과 정부 정책도 R&D 투자와 지원에 집중해야 하는 시기”라고 강조했다.
[한마디 시장전망]
△“혹독한 겨울이다. 내년까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공급망이 경색됐는데 이게 풀려야 한다. 내년에는 인플레이션과 고금리 분위기가 완화되면 반도체 소부장 공급망 문제도 해결되면서 수요가 어느 정도 발생할 것 같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R&D 투자를 확대해서 체력을 길러야 한다”-이창한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부회장-
△“2분기까지 침체가 이어지다가 3분기부터 업턴 가능성이 짙다. 그 기간에 반도체 제조사 투자가 축소되기 때문에 소부장 기업이 문제다. 특히 장비 매출이 줄어들면 이익이 하락, 신규 투자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미래 승부가 될 R&D 투자는 놓치면 안 된다. 여기서 정부 역할도 필요하다.”-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교수)-
△“반도체 패키징은 철저히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동향과 일치할 것이다. 스마트폰이나 PC에 실장되는 반도체는 메모리 또는 시스템 반도체 모두 패키지 물량 증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패키지 형태의 변화도 없을 것으로 보인다. 데이터나 전장용 반도체 패키지 물량은 지속 증가가 예상된다. 열특성 등 차별화한 패키지와 기술이 지속 발전할 것이다.”-강사윤 한국마이크로전자및패키징학회장-
△“시스템 반도체 시장도 상당히 어렵다. 신규 수요를 민·관 차원에서 발굴해야 한다. 시장 성장이 기대되는 인공지능(AI) 반도체의 경우 대부분 외산 제품을 사용, 국내 기업은 한계가 있다. 반도체 불황이 예상되는 만큼 국내 수요 발굴로 우리 기업의 성장을 견인해야 한다.”-이혁재 서울대 시스템반도체산업진흥센터장(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
권동준기자 djkwon@et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