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 반도체 성능 향상을 위해 시스템 반도체(로직)와 메모리 업체간 협업이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시스템 반도체 일종인 컨트롤러가 고대역폭메모리(HBM) 안에 통합되는 등 성격이 다른 두 반도체를 수직으로 쌓아 직접 연결하려는 시도가 업계서 일고 있다. 향후 중앙처리장치(CPU)나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프로세서와 메모리 결합까지 전망된다.
◇ HBM, 로직을 품는다
SK하이닉스는 최근 TSMC와 협력해 차세대 고대역폭 메모리인 HBM4를 만들기로 했다. HBM4는 2026년 양산을 목표로 하는 메모리 반도체다. 특이한 것은 SK하이닉스가 기존 독자 제조를 벗어나 TSMC와 협력을 택한 점이다.
이유는 HBM4에 시스템 반도체를 접목하기 위해서다. SK하이닉스는 HBM 패키지 내 최하단에 탑재되는 칩인 '베이스 다이(Base Die)'에 시스템 반도체의 일종인 메모리 컨트롤러를 적용할 계획이다.
이 컨트롤러는 HBM 신호와 전력을 제어하는 역할을 한다. 지금까지 메모리 컨트롤러는 HBM 패키지 밖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다보니 전력 효율과 신호 전달 속도 향상에 제한이 있었는데, 이를 개선하기 위해 HBM4에서 컨트롤러를 내부에 넣기로 했다.
기존 베이스 다이는 HBM 제조사인 SK하이닉스가 만들었다. 그러나 여기에 컨트롤러를 적용할 경우 수나노미터(㎚) 수준 첨단 공정이 필요하다. SK하이닉스가 파운드리 강자인 TSMC와 손잡은 이유다. TSMC가 HBM을 제어할 컨트롤러(베이스 다이)를 만들고, 이를 다시 SK하이닉스 HBM4과 통합한다. HBM과 상하로 맞붙어 직접 제어하기 때문에 빠른 신호전달과 저전력 구현이 가능하다. 컨트롤러가 별도의 자리를 차지하지 않아 최종 칩(AI 반도체) 크기도 줄일 수 있다.
양사는 메모리 컨트롤러 뿐 아니라 다른 시스템 반도체 적용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HBM, 나아가 AI 반도체 칩 전체의 저전력·고성능을 구현하기 위해서다. AI 반도체 개발사이자 양사의 핵심 고객사인 엔비디아 요구로 풀이된다.
◇CPU·GPU와 메모리를 수직 통합
시스템 반도체와 메모리 협업은 앞으로 더 직접적이고 통합적인 모습을 띠게 될 전망이다. 단순히 컨트롤러를 메모리에 넣는 것이 아닌, 중앙처리장치(CPU)·그래픽처리장치(GPU)와 메모리가 합쳐지는 수준까지 추진되고 있다.
실제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CPU·GPU 같은 프로세서와 메모리를 3차원(3D) 구조로 통합하는 기술을 연구 중인 것으로 파악됐다. D램을 위아래로 쌓아 HBM을 만들 듯이 프로세서와 메모리를 수직으로 적층해 칩 간격을 최소화하고 신호 송수신(I/O 수)를 늘리는 복안이다.
이 사안에 정통한 메모리 업계 관계자는 “최근 프로세서 위에 메모리를 쌓느냐 아니면 메모리 위에 시프로세서를 쌓느냐는 수준의 논의까지 오가고 있다”고 말했다.
이같은 움직임은 메모리 업계 전반의 역할 변화를 요구한다. 기존처럼 표준 규격에 맞춘 메모리를 대량 양산해 시장에 공급하는 방식으로는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AI 반도체 칩이나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 등 특정 반도체 팹리스 고객사에 최적화한 메모리를 개발·생산해 공급하는 '맞춤형(커스터마이즈드) 메모리'로 대대적인 전환이 이뤄질 전망이다. 메모리 사업 역시 '수주형'으로 바뀌는 만큼 고객사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로 부상할 것으로 관측된다.
메모리 업계 관계자는 “앞으로는 메모리 제조사가 '맞춤형 메모리'를 위해 파운드리 뿐 아니라 반도체 팹리스(고객)와 직접 일을 해야하는 변화가 생길 것 같다”고 말했다.
권동준 기자 djkwon@etnews.com, 박진형 기자 jin@etnews.com